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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은휘(金殷輝) 경우, 이들을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 등용 방법)로 천 313
거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며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구비전승
1541년(중종 36)∼1611(광해군 3)
1576년 경상도 도사,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자는 경회(景晦), 할아버지는 군수 종윤(宗胤)이고,
1589년 낙향하여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치며 죽도에 · 민속
아버지는 증찬성 호(鎬)이며,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큰아버지인 석(錫)에게 입양되었다.
머물렀던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도모했다는 역모사건이
성리학의 대가이며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설天命圖說> · 경기도당굿과
발생하여, 그와 정치적으로 관련 있는 동인(東人)들이 대거
의 저자 정지운의 제자이다.
실각하고 사사되었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고 음보로 벼슬길에 나가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별제(司圃署別
며, 이후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 김천일도 나주 경현서원
提)·수운판관(水運判官)·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감찰·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호조좌랑·공 경기재인청
(景賢書院)의 원장을 맡았고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부각
조좌랑·형조정랑·호조정랑·종친부전적(宗親府典籍)·통례원상례(通禮院尙禮) 등을 역임하였다.
되었다.
외직으로는 교하현감·임피현령 및 청도·단양 등 여러 고을의 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 성씨
지냈다.
한성을 점령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5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체찰사 정철(鄭澈)의 · 인물
명의 관군이 수원에서 겨우 수천의 왜적에게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고경명(高敬命)·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이듬해 관병과 의병의 연합군을 이끌고 오산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지키
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
며 왜군과 싸웠다. 그런 와중에 정철이 무고를 당하여 파직되자 낙향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호패법
璹), 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00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
(號牌法)을 시행하려 하자 그 불편한 점을 상소하였고, 정여립(鄭汝立)을 여러 차례 규탄하였다. 재질
에서 조헌(趙憲)과 호서 지방 의병에 관해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
이 민첩하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며, 만년에 수직(壽職 : 나이가 많은 자에게 주는 대우직)으로 가선
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 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대부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오산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
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
참고문헌
렸다. 그 공으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았다. 행주산성에서도 의병을 투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谿谷集.
입하여 전투를 벌였다. 또한 한강변에 산재한 왜적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다
음 해 정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평양성을 수복하고 개성을 향해 남진(南進)할
때, 그들을 도와 도로(道路)·지세(地勢) 및 적정(敵情)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10. 김천일(金千鎰)
왜군은 남쪽으로 퇴각하여, 조선의 남부지역을 점령하여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 전
1537년(중종 32) ∼ 1593년(선조 26) 략의 첫 번째 목표가 진주성(晉州城)이었다. 왜적의 목표를 간파한 조선군은 경남 의령에 집결하였으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자는 사중(士重)이며 호는 건재(健齋), 며 진주성을 사수하는 방안을 두고 의견을 달리했다. 명나라 원군은 대구와 남원에 주둔하였고, 도원
극념당(克念堂)이다. 나주 출신이다. 증조부는 연산군 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러 번의 부름 수 권율(權慄)은 남원 운봉,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합천 삼가에 머물며 왜적의 동태를 살폈다. 하
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던 목사공(牧使公) 순형(順炯)이고, 조부는 주부 윤손(潤孫)이며, 부친은 진사 지만 김천일은 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에 입성하여 사수(死守)하였다.
언침(彦琛)이고,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감(瑊)의 딸이다. 2차 진주성 전투 중에 1593년 6월 15일 왜적은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주력 장수를 내
순절한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조선 세워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김천일은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부장 임우화(林遇華)를 성밖으로 보냈으
중기의 대학자인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밝았으며,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 나 왜적에게 잡혀 나무기둥에 묶어 조선군의 항전의지를 꺾고자 했다. 이어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이
春) 등과 교유하였다. 전개되었으며 왜적도 총력을 다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동분서주하며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황
1573년(선조 6) 그의 학행이 알려지자 유일(遺逸 : 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 진(黃進)이 이마에 총탄을 맞고 급사하였으며, 백병전이 벌어져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
는 인재 등용책.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으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6월 29일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촉석루(矗石樓)로 밀려나자 아들 김상건(金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