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0 - 제6권
P. 310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
                  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

                  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
                  시했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 같

                  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
                  (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 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여 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
                  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장군이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왜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
                  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해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

                  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
                  (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

                  에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왜병은 7개부대로 나누어 계속 맹렬한 공격을 가해와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장군의

                  일사불란한 통솔력으로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싸웠다. 하지만 일본군과 긴 싸움으로 화살이
                  떨어지고, 무기도 부러져 없었다. 속절없이 새카맣게 행주산성으로 기어오는 일본군을 보고 있을 때,

                  부인네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주어 그 돌을 던져 일본군을 막았다. 장군이 부인네들이 날라 주는 돌
                  로 겨우 일본군을 막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충청도 수사 정걸은 급히 화살 2량을 권율이 있는 행주산

                  성으로 보내주었다. 화살로 인해 행주산성의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는데 일본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돌만 있는 줄 알고 다시 행주산성으로 몰려왔다. 장군은 새카맣게 몰려오는 일본군을 전멸

                  시켰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
                  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장군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장군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

                  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
                  수 이빈(李薲)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
                  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오산시사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인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별세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제

      6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해 그곳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
      권
                  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독산성에서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독산성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
    308
   305   306   307   308   309   310   311   312   313   314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