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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김교철(金敎哲)
1880년(고종 18) 7월 27일 ~ 1960년
오산시 인근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서 1880년 7월 27일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며 오산감리교회 목
사였다. 어릴 때부터 한학에 뛰어났으며, 학문에 대한 열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31세 되
던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교사들의 권유를 따라 1911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1년 만
에 졸업하였고, 장래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33세의 늦은 나이에 피어슨 성서학원(聖書學院)을 입
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선생은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와 교육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고향인 화성시 장안면
에 장진의숙(長進義塾)을 자력으로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1916년 남양교회(南陽敎會, 현
화성시 남양동 소재) 담임 전도사로 파송되어 1918년 목사 동석기(董錫琪)가 남양에 오기까지 수촌리
에 거주하면서 남양·서신·제암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목회 일을 보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장안면 수촌리에 거주하면서 수촌교회(水村敎會)와 제암교회(堤
岩敎會)의 담임 전도사를 맡고 있었다. 선생은 3·1운동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일자 제암리 이장이면
서 제암교회의 권사인 안종후(安鍾厚)·홍원식(洪元植) 등에게 제암리 지역을 맡기고, 자신은 수촌리
교인과 주민들을 지휘하며 우정면(雨汀面)·장안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19년 4월 3일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도 적
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이자 수촌리 구장이었
던 백낙열(白樂烈)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과 수촌교회, 제암리교회의 담임 전도사 김교철(金敎
哲)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력이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3일 이들은 석포리의 차병한(車炳漢), 차
희식(車喜植)을 중심으로 한 유교 토착 세력과 연합하여 장안면과 우정면의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
괴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 군중은 화수리의 경찰 주재소로 몰려
가 일제 경찰에 항복을 요구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
端豊太郞)가 도주하며 시위 군중에게 총을 쏘아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차희식은 장제덕
(張濟德), 이순모(李順模) 등과 함께 장안면 주민들을 탄압해온 가와바타를 추격하여 처단하였다.
일제는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수촌마을을 급습하여 수촌교회와 집집마다 불을 질렀고, 황급히 뛰쳐
나온 주민들은 일제 헌병의 총칼에 죽거나 부상당했다. 수촌마을 42채의 가옥 가운데 4채만 남은 참
변을 듣고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찾아와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또한 4월 21일에는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화수리로 들이닥쳐 가옥을 방화하고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는 화수리참변(花樹
오산시사
里慘變)을 일으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생은 붙잡혀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3
제 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감한 선생은 1924년부터 1946년까지 오산감리교회(일명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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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교회, 오산시 오산동 소재)에서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50년 은퇴하여 1960년 타계하였다. 정부
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10 한편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에는 <장안 3·1운동기념비>가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수촌마을 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