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8 - 제6권
P. 298
며, 박경엽(朴敬燁)의 난(亂)을 토평하고 문학을 진흥시켰다. 그는 신라 육촌장 중의 하나인 양산촌의
촌장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이다. 따라서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分籍)된 성씨이다. 이개
가 합천호장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系代)를 이루고 있
다. 합천이씨는 일찍이 합천을 중심으로 누대에 걸쳐 합천에서 세거하다가 점차 번창해 지면서 경남
거창과 경북 고령 등지로 산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22세 이화용(李化龍) 대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경
기도 강화에 살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양주, 광주 등 경기지역에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
다. 합천이씨가 오산 수청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게 된 기록은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발행한 성호면의 집성촌을 조사한 『조선의 취락』에 가구 수가 20호가 되었고, 1957년 『경기도지』에서
조사된 집성촌으로 기록된 14개 마을 중 수청동 합천이씨 세거 가구 수는 21호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청동 합천이씨 입향조에 대한 기록과 그 후 배출된 후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더 이상
살펴보기 어렵다. 한편, 수청리 옛 자연마을은 도시화 물결 속에 해체된 지 이미 오래며, 특별히 집성
촌을 이뤘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제10절 외삼미동 영월엄씨
외삼미동 영월엄씨((寧越嚴氏) 시조는 고려 때 호부 원외랑을 지내고 나성군(奈城君)에 봉해진 엄
림의(嚴林義)다. 이는 본래 중국 한나라 때 엄자릉(嚴子陵)의 후손으로 당의 현종이 새로운 악장(樂
章)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전파할 때 엄림의를 정사(正使)로 영월 신씨의 시조인 신대랑(辛待郞)을 부
사(副使)로 우리나라에 왔다고 한다. 당시 통일신라 때로 엄림의는 영월 행정(杏亭)에 터를 잡고 살
게 됨으로써 영월엄씨의 시조가 되었다. 영월엄씨는 크게 세 갈래의 파조를 이루는데 이는 시조 엄림
의 아들 삼 형제가 각각 분파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월엄씨가 터를 잡은 곳은 영월 동강과 서
강이 남으로 뻗어가다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이며 그곳에는 천골만장(千骨萬狀)의 수령이 천 년
되는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 7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영월엄씨를 상징하는 신수(神樹)로 유명
하다. 한편 영월엄씨가 명문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충의공 엄흥도(忠毅公 嚴興
道)의 충절이 빛을 보면서였다. 당시 버려진 단종(端宗)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위
엄을 무릅쓰고 강가에 버려진 시신을 동을지산(冬乙旨山)에 염장(殮葬)하면서 “좋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는다”라고 한 엄흥도의 유훈(遺訓)이 바로 엄문(嚴門)의 가헌(家憲)이 되었다. 영월
엄씨가 오산 외삼미동에 입향한 내용은 참고할 자료가 없어 기록할 수 없으나 수백 년 전부터 집성촌
오산시사
을 이루며 세거함으로써, 1957년 『경기도지』에서 조사된 집성촌 기록에 의하면 해평윤씨와 더불어 14
개 마을 중 외삼미동 영월엄씨 세거 가구 수가 22호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외삼미동도
제
6 도시화 물결 속에 각종 상업 시설과 공장 등이 들어와 집성촌을 이뤘던 옛 자연마을의 형태를 찾기
권
어렵게 되었다.
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