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5 - 제6권
P. 295
(孔夫子聖跡圖)의 목판본이 궐리사에 보관되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293
오산시 궐동은 원래 화성부 중구면 구정촌이었으나 정조가 현륭원에 행차할 때 남쪽으로 까마귀 구비전승
떼가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궐리까지 오게 되었다. 정조는 은행나무에 얽힌 공서린의 사연을 듣고 경
기감사와 화성유수에게 공자의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특히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궐리를 따서 · 민속
사당 이름을 ‘궐리사’라 하고 지명도 구정촌에서 ‘궐리’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손수 편액을 써서 · 경기도당굿과
내려주기도 했다. 오산시 궐동에 위치한 화성 궐리사는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하나로, 기묘 명현의
한 사람인 공서린이 관직을 그만두고 내려와 강당을 세우고 유생을 가르쳤던 곳이며 1994년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950년 이전 궐동 전체 53가구 중 50가구가 곡부공씨였을 만큼 큰 집
경기재인청
성촌을 이뤘지만, 지금은 10가구 정도 살고 있으며, 은계동, 갈곶동 등 오산 시내에 흩어져 살고 있다.
제5절 서동 부평이씨 / 성씨 · 인물
서동의 부평이씨(富平李氏)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워 벽상공신에 채록되고 벼슬이
삼중대광에 오른 이희목(李希穆)이다. 부평을 관향(貫鄕)으로 삼기는 4세손 이정공(李靖恭)이 문하시
중을 지내고 부평백(富平伯)에 책봉됨으로써 그 후손들이 지금의 부평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
편 이정공은 고려 문종 13년(1059)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냈으며 왕명으로
흥왕사의 비문을 써 올려 크게 칭찬을 받았다. 문종 16년(1082)에는 참지정사로 국사(國史)를 편찬했
으며 사후 숙종(1095~1105)의 사당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부평이씨가 오산 서동에 입향(入鄕)해 집성촌을 이룬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족보와 여러 문헌
자료를 살펴보면 병자호란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험천(險川 : 지금의 용인
시 수지구 풍덕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숙종 33년(1707) 충신정려문과 함께 홍문관 부제학
추증이 내려진 이상재(李尙載 1607~1637)가 서동에 장사지내진 것으로 볼 때, 사후(死後) 입향조(入
鄕祖)로서 이때부터 정착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서동 부평이씨는 크게 번성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홍문관부제학 이상재의 아들인
이조참판 이세갑(李世甲 1628~1702), 이세갑의 아들 이조판서 이정사(李廷師1 650~1723), 이세갑의
차남으로 영조 대 노론의 중심인물인 조상경(趙尙絅 1681~1746)의 장인인 형조정랑 이정태(李廷泰
1652~1695), 대구판관 이정공(大邱判官 李廷恭), 중추부사 이성원(中樞府事 李聲元), 연천현감 이홍
운(連川縣監 李鴻運), 절충장군 이붕운(折衝將軍 李鵬運), 만경현령 이주호(萬頃縣令 李周虎), 돈령부
도사 이진원(敦寧府都事 李鎭遠), 중추부사 이선영(中樞府事 李善永), 직제학 이병만(直提學 李秉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서동 부평이씨 집성촌에 관련된 내용은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취락』의 기록
에 의하면 28가구가 살았으며, 1957년에 발행된 『경기도지』에는 서리에 32가구 세대를 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2010년 편찬된 부평이씨 족보에는 38세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오산시 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