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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해평윤씨 3세 윤석(尹碩 ?~1348)은 충숙왕 때 정승이 되어 해평부원군(1328)에 봉해졌다. 그                                   289
                  는 재임 때 고려를 몽골의 행성(行省)으로 편입하려는 것을 반대하여 이를 철회하는 데 공을 세웠으                                          구비전승

                  며, 해평에서 낙동강 수해를 막기 위해 강변 둑과 숲을 가꾸어 농사를 번성하게 하였다. 6세 윤사영
                  은 조선 태종 한성부윤을 지냈는데 도성 건설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8세 윤기반(尹起磻)은 단종 2                                        · 민속

                  년(1454)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삭령군수, 경기도사,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 경기도당굿과
                  윤기반은 성종 때 경연에 나가 상서를 올렸는데 부정·비리를 일삼는 관리들을 적발하여 국가 사정

                  에 공헌하였다. 그 후 ‘폐비 사사건’에 연루되어 갑자사화 때 윤기반의 집안 16명이 참살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이때 어린 혈손 윤응상은 유모에 의해 구출되어 경기도 오산시 외삼미동 40번지(부릉
                                                                                                                    경기재인청
                  구리 오리골)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면서 사면 복권되었고, 윤
                  응상에게 사헌부 감찰직을 내려 가문을 재건하게 되었다.

                    오산 외삼미동 해평윤씨 입향조가 된 11세 윤응상은 관직을 받고도 한양으로 가지 않고 피신처인                                           /  성씨
                  외삼미동에 정착하게 된다. 지난 갑자사화 때 가몰(家沒)에 대해 다시는 이러한 우환을 당하지 말아                                          · 인물

                  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사무쳤을 것이다. 그가 고민 끝에 생각한 것은 다시는 중앙 정치 무대에 나가
                  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과(大科)가 아닌 별과(別科)에 출사하였다. 대과(大

                  科)에 나가게 되면 결국 중앙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정치세력에 휘둘리게
                  되어 언제든 정치 싸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란 것이다. 그래서 변방 군현 수령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

                  한 것이다. 이후 윤응상 장손자 윤항은 거제현령, 고손자 윤필주는 죽산도호부사를 지냈으며, 후손
                  대대로 갑산군수 훈련원 주부 등 무반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오산시 외삼미동 부릉구리 오리골에는 작은 못이 샘솟아 한집 살림을 차릴 물이 있었으므로 이곳
                  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윤응상의 아들 윤완이 지금의 종가집터(외삼미동 214)에서 잠시

                  쉬는데 신령이 꿈에 나타나 "네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 후손이 번성하리라"라고 말을 해 꿈에서 깨
                  어 기이하게 여긴 후 이곳에 터를 잡고 대대로 살게 되어 종가댁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종갓집은 17대

                  째 500여 년간을 종택으로 존속하며 지금까지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대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지
                  금껏 후손들이 선영의 제향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격변의 역사를 견디며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군

                  현의 수장이 된 양반집에서 유행하는 기와집을 짓지 않고 근검생활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해평윤씨의 농토는 ‘새밀’의 땅을 벗어나지 않았다. 농지를 이웃 주민에 임대하고 분할 상환하면 소유

                  권을 넘겨주니 마을 주민들은 자연히 윤씨 집안을 신뢰하였으며, 인근에서 윤 씨와 혼연(婚緣)을 영
                  광으로 알았다.

                    근대에 이르러 계몽운동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윤학영은 문중과 의논하여 사립학교인 삼
                  미의숙을 세워 빈궁한 주민들에게 신지식을 습득시켜 사회에 진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 수립 후 학교와 부속 토지를 국가에 기부하여 현재 오산 화성교육지원청 부지도 삼미학교 부
                  속 토지였다. 또한, 윤학영은 오산읍장을 지내면서 오산중·고등학교 재정 기부운동과 독산성 유적

                  중건, 오산천 북쪽인 궐동개발 등 오산의 도시 세 확장에 진력하였다. 광복 후에는 윤 씨 종중에서 거
                  금을 들여 마을 전체 가구에 전기화 사업을 단행하여 다른 지역보다 앞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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