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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950년대 전후로 권씨, 한씨, 김씨, 구씨가 마을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고 있으며, 현재도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낙농과 과수 등 근교농업이 발달하였고 도로변을 중심으로 원룸, 유치원, 공장들이
들어섰고 아직도 자연마을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오산시 서동 부평이씨 선산에는 충신 이상재 정려각과 이상재 묘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들의
묘가 한 묘역을 이뤄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자손들이 모여 시제를 올리
는 등 아직도 집성촌의 기능이 작동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재 충신정려문은 숙종 33년(1707)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조 17년(1741) 왕의 특명에 의해 추
가로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추증되었다. 정려각(旌閭閣)에는 예조판서 송면재(宋冕載
1764~?)가 순조 26년(1826)에 지은 정려기문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제6절 내삼미동 경주김씨
내삼미동의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鐘 :
永芬公派)과 넷째아들 김은설(金殷設 : 大安君派)을 1세 조로하고 있다. 경주김씨의 득성조(得姓祖)라
할 수 있는 김알지(金閼智)는 신라 탈해왕 9년(65년) 금성 서쪽 시림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금
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탈해왕은 이를 기뻐하며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는데 이로써 경주김
씨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어 나라 이름
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라에서 웅기(雄起)한 경주김씨는 삼한의 대표적인 성씨로
번성할 수 있었다.
한편, 계림군파 2세인 김계성(金季誠) 때부터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에 대대로 세거한 것으로 보이
며, 5세인 김홍령(金弘齡) 대에 이르러 수원 일원으로 옮겨오고 일부는 김귀령(金龜齡) 대 이후 평택
으로 이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용인에 세거한 것으로 보이며, 오산 내삼미동의 경주김씨는 수
원으로 옮겨간 5세 김홍령파의 일족으로 예측되나 내삼미동 경주김씨 입향조에 대한 확실한 문헌상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더 살펴보기 어렵다. 다만, 1957년 『경기도지』에서 조사된 집성촌으로 기록된
14개 마을 중 내삼미동에 경주김씨가 20여 호 세대수를 이루며 세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7절 원동 김해김씨
오산시사
원동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제 18년 가락(駕洛)의 아도(我刀), 여도(汝刀), 피도(彼刀), 오도(五刀), 유천(留天), 신천오천(神天五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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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신귀(神鬼) 등 구간(九干)이 백성들과 더불어 놀이를 나갔다가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
려 살펴보니 어린 동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빼어나 모두 예로 맞아 왕으로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
294 王)이고 나라를 가락(駕洛)이라 하였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