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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산시 두곡동에 수성최씨 효자정문이 있는데 최정린(崔廷隣1760~1799)의 효행을 기리기 291
위해 조정에서 순조 31년(1831) 조봉대부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으로 추증하고 1986년 자손들이 구비전승
두곡동 후록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두곡동에는 최정린의 증조부
최차흥(1676~1732)묘와 22세 사천현감 최건혁의 묘가 있었다. 집성촌은 대개 사회적으로 유력한 양 · 민속
반, 유림 등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종가를 중심으로 선조의 제례, 상호부조를 통해 협동 · 경기도당굿과
단결함으로써 향촌 자치를 이루고 그 지역에서 권세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볼 때 두곡동의
수성최씨 집성촌은 산업화, 도시화 과정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전통문화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으나
농업 기반 사회가 무너지고 산업화 사회로의 변화 속에 우리나라 대부분 마을들이 그랬듯 이곳에도
경기재인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이 집성촌의 기능이 차차 약화되어 갔다. 다만 몇몇 후손들이 선산을 관
리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 성씨
제3절 누읍동 전주이씨 · 인물
누읍동 전주이씨(全州李氏) 집성촌의 시조는 조선 태종의 여덟째 아들 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
1422~1464)로 익녕군의 둘째 아들 수천군 이정은(秀泉君 李貞恩)이 한성부에서 시흥으로 이주해 오
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수천군의 둘째 아들인 부림수 이표(李豹)의 자손들이 오산 누읍동 일대
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부림수 이표(缶林守 李豹)의 장자 마령부수 이란종(馬靈副守 李蘭宗)은 보
사공신 등 공조참의에 추봉된 이원기를 비롯한 후손들이 대를 이어 약 450여 년간 누읍동에 정착하
여 왔다. 특히, 익녕군의 4대손인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선조·인조 때까지 영의정을
다섯 번이나 역임하고 병제와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공헌한 조선 시대의 청백
리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다.
오산 누읍동에 집성촌을 이뤘다는 문헌 기록은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취락』
에 누읍동 전주이씨 세대수는 40호가 되었으며, 1957년 경기도에서 조사한 『경기도지』에 의하면 누
읍동 전주이씨 세대수는 39호로 산업화 이전 전주이씨가 누읍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읍동 마을 지형은 마치 소가 누워있는 형태여서 누운소로 부르던 것이 음운변화 과정을 거쳐 누
읍리가 되었고, ‘늪새’라고도 불렸다 하고, ‘누읍’ 즉, 어느 시기 행정치소가 있던 곳이라고도 하여 누
읍리라 불렸다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 누읍동은 수원군, 1910년대 수원군 초평면, 1940년대 수원군
오산면, 1960년대 들어 화성군 오산읍 누읍리에서 1989년 오산읍이 시가 되면서 누읍리에서 초평동
으로 행정동의 명칭이 바뀌어 왔다.
누읍동은 오산시 서쪽 지역 오산초등학교 뒤쪽 산 감투봉 아래서 오산천까지 비교적 넓은 지역의
마을로 형성되었으며, 동네 입구는 늠말, 남쪽으로는 잿말, 서쪽은 큰말로 나뉘어 불렸다. 오산의 서
쪽 오산천 변부터 넓게 형성된 늪새뜰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야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