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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7~80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농업을 주업으로 했던 마을 단위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을
                  위해 외지로 나가게 되었고, 또한, 오산의 도시화 과정에 새로운 주거단지로 인구가 유입되는 현상

                  속에 옛 오산의 마을 단위별 성씨 구성이 해체되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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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오산의 집성촌







                    마을 단위의 집성촌이 형성되는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와 후기의 관습이 임진왜란과 병자호
                  란을 거치며 점차 변화를 갖게 되었다. 여성의 출가로 자녀 균등 상속은 차등 상속으로, 제사의 자녀

                  윤회는 중자윤회(衆子輪迴) 장자전행으로 바뀌면서 점차 부계친족이 중심이 되는 동성의 집성촌 마
                  을이 생겨나고 이런 관행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했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좌·우익의 대립,

                  6·25전쟁을 거치면서 조선 시대의 신분질서가 결정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겪게 된다. 1960년대 경
                  제개발 추진과정에서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유입이 꾸준히 진행되고 핵가족화가 확대되면서 집성촌

                  은 점차 와해되어 갔다.
                    특히 오산은 산업화에 따른 인구이동과 택지개발로 인한 도시화로 전통마을이 점차 사라지거나 형

                  태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멸실되었다. 또한, 핵가족화가 확대되면서 전통적 유교 개념이 점점 희미
                  해지고 공동체적 삶의 개념에서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으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2019년 현재 오산에 전통적 자연마을로 남아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현재 오산 각 동별
                  자연마을로 남아 있는 곳을 찾아 집성촌을 이루었던 성씨의 입향조를 중심으로 선산에 조성된 묘소,

                  기타 집성촌을 형성했던 전통마을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아직까지 집성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어떤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하고 해당

                  집성촌 관련한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시간적 물리적으로 오산에서 집성촌을 이루
                  었던 모든 성씨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조사가 가능했던 대표적인 성씨만을 기술하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제1절   외삼미동 해평윤씨
      오산시사


                    오산 외삼미동 해평윤씨(海平尹氏)는 경상도 해평군을 본관으로 삼은 고려 원종 때 수사공(守司空,
      제           1273)으로 왜구와 몽골 침략으로 혼란의 시기에 무장으로서 공을 세운 윤군정(尹君正)을 시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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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길장│오산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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