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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에 자리해서 누읍(樓 다락누, 邑 고을읍)이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누읍동 동네 앞 넓은 농지는 공장지대로 바뀌어 누읍공업 단지와 택지개발로 인해 아파트 단
지 등 주거지역으로 변화되어 옛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약 50여 가구 300여 명의 주민이 살았던 곳이
이제는 자연마을이 모두 사라지고 신도시개발 계획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누읍동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곳이 1960년대 후반부터 오산천을 중심
으로 제지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무궁화 제지, 신호제지, 수출포장 등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민
들은 농사와 더불어 공장에 취업하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한편, 공장 일자리를 찾아 외지에서 온 사
람들을 대상으로 농가 주택에 방을 들여 월세 임대를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새마을운동
을 계기로 주택을 개보수하고 신축하는 등 생활 형편이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타지에서 옮겨온 사람
들이 늘어나면서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공동우물은 오염되어 폐쇄되기도 했다. 최근 이어진 택지개
발 사업에 따라 옛 농촌 마을의 형태와 정취가 모두 사라지고 누읍동 전주이씨 집성촌도 산업화, 도
시화에 변화에 따라 구성원들이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누읍동 전주이씨 선영은 누읍동 산 4
번지에 있었으나 세교 택지개발 사업에 따라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 740-4로 천묘하여 이제는 흩어
져 살던 자손들이 큰 시제 때 함께 만나 제향을 올리는 것으로 자손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제4절 궐동 곡부공씨
오산 궐동 곡부공씨(曲阜孔氏)는 중국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본관은 곡부(曲阜) 단본이다.
시조는 중국의 공자(孔子)이며, 본명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로 중국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났다. 충
정왕 3년(1351) 54대손 소(紹)가 원(元)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魯
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여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고 회원군(檜
原君)에 봉해져 창원(昌原)을 식읍으로 받아, 우리나라 곡부공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본래 우
리나라 공 씨는 창원 공씨라 불리었는데 정조 18년(1794) 공서린의 9대손인 공윤항(孔胤恒)이 알성시
에 급제하여 정조 명으로 방목단자(榜目單子)에 본관을 곡부(曲阜)로 넣게 하면서 이때부터 우리나라
공 씨는 곡부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궐동 곡부공씨의 입향조는 공소(孔紹)의 6세손인 조선 성종 때 군자감정을 지낸 공희(孔禧)가 평택
시 현덕면 덕목리에서 화성부 중구면 구정촌(궐동)으로 들어와 세거하면서부터이다. 공희가 오산에
입향 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했는데 소격서령(昭格署令) 공숙(孔淑), 영의정에 추증된 공제노(孔悌老),
오산시사
우봉현령 공의달(孔義達), 문헌공 공서린(孔瑞麟 1483~1514), 공윤항(1769~?), 독립운동가 공칠보
(1883~1939), 사회운동가 공석정(孔錫政 1902~1944) 등의 후손들이 배출되었으며, 한편, 정조 16년
제
6 (1792) 8월 27일 공자탄신일을 맞아 정조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공자의 자손을 우대할 방도를 강구하
권
라” 명하고 공서린이 강학(講學)하던 옛터에 궐리사를 신축하게 하고 현판을 내려주었다. 이후 여러
임금이 제문을 내렸으며, 공자가 세상에 태어나 영면할 때까지의 성적(聖蹟)을 기록한 공부자성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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