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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같은 해 8월 사헌부 장령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4년(고종 41) 1월에는 홍문관 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편수관에 임명되었고, 그해 3월에는 병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1897년(광무
원년) 11월에는 중추원 3등의관으로서 주임관 5등에 서용되었고, 1900년(광무 4)에는 홍문관 시독서
판임관 6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5월에는 홍문관 시독서 판임관 4등이 되었다. 이어 1900년
(광무 5) 9월에는 규장각 직각서 판주관 4등이 되었고, 1902년(광무 7) 1월에는 장례원 상례로서 주임
관 6등에 서용되었다가 2월에는 4등이 되었다. 1905년(광무 9) 11월에는 국장도감 도청이 되었다가
1906년(광무 10) 3월 2일 정3품 통정대부로 승격하면서 비서감승 주임관으로 서용되었다. 같은 해 7
월, 8월에는 비서감승 겸 태의원 부경자를 겸임하게 되었고, 이어 8월 13일에는 예식원 장례까지 겸
직하였다.
1907년(광무 11) 4월 6일 시강원 시독관 주임 3등을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니 공의 나이 41세로 아까
운 나이였으나 당시의 조정 상황에서 그냥 눌러앉을 수 없는 치욕적인 사건이 많았다. 이에 공은 모
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오산으로 내려왔다.
1907년은 고종이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파하여 일본의 침략과 을사늑약의 부당
성을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이를 트집잡아 일본은 왕위를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시키려고 하는 때였다. 하루는 공이 시강원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있을 때 고종의 전교가 있어 급
히 어전으로 나가 부복하니 고종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옥좌에서 내려와 공의 두 손을 잡고 떨리
는 목소리로 “의친왕 척(拓), 영친왕 은(垠)을 잘 부탁하오”라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것이
고종과 공의 마지막 대면이고 대화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순종에게 양위되었다.
공이 그간 시강원에서 시독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고종의 셋째 아들 영친왕 은을 가르치는 일을 주
로 담당하였다. 영친왕의 나이 5세 때(1900년)부터 공이 조정의 벼슬을 사직할 때까지 사제의 관계를
유지하여 왔으니 영친왕은 공을 몹시 따랐다. 공이 향리인 오산 당촌으로 낙향하여 향리에서 서당을
운영하며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인 1907년(순종 원년) 12월 영친왕의 나이 11세 때 일본의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일본행에 영친왕은 경부선 기차로 부산으로 내려가다
오산에 살고 있는 스승을 마지막으로 뵙고자 미리 기별하여 당시 수원군에서 인력거를 보내 공을 오
산역으로 모셨다.
1905년 오산역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황실 기차가 서게 되니 인근에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한다.
영친왕은 스승인 공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으며 스승인 공 역시 나라의 힘없음을 한탄할 뿐 말문을
열지 못하여 안타까움만 남기고 영친왕은 일본으로 떠났다. 그 후에도 영친왕이 조국에 다니러 오고
오산시사 갈 적마다 오산역에서 공을 만나고 갔다. 공은 오산 당촌에서 서당을 운영하는 한편, 오산화성궐리
사의 도유사(都有司)를 역임하는 등 사회 교육사업을 하다 1945년 1월 23일 해방의 기쁨도 보지 못한
채 영면하였다. 저술로는 『가언 선행록』이 청송 심씨의 집안에 전해지고 있으며, 묘소는 오산시 원동
제
6 산 42번지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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