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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옥(兪沃)


                  생몰년 미상
                    중선 중기 무신으로 오산시 서동 출생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유상지(兪尙智)의 고손이며, 유수(兪遂)의 증손자이다. 유여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무과에
                  올라 약관 24세에 기보병마(畿輔兵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수원, 남양 등지에서 왜군과 싸웠고, 강화에서 왜군의 조총을 맞아 순절하였다. 전후에 선무원
                  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으며, 묘소는 오산시 가장동 의정평(艤艇坪)에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창원 유씨 족보.





                  34. 유진홍(兪鎭弘)


                  1896년 7월 21일 ~ 1961년 2월 11일
                    오산시 세교동 384번지에서 태어나 사망한 농민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유

                  진홍은 1919년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고자 상경하여 체류 중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
                  현장을 목도하고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 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곧바로 귀향한 그는

                  김경도(金敬道)·김용준(金用準)·이성구(李成九)·정규환(鄭奎煥)·이규선(李圭璇)·안낙순(安樂
                  淳)·공칠보(孔七甫) 등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의 동지가 규합되자 의거할 것을

                  모의하고 각자가 비밀리에 각 동리로 연락을 취할 것을 정하고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거사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3월 29일 오산 장

                  날을 기하여 거사 일을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3월 29일 모두가 장꾼으로 행색을 변장한 채 경비하던 일경의 눈치를 살피며 오산장터에

                  모였다. 정오가 되자 유진홍은 장 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대한 독립만세를 삼창하니 수백 명의
                  장꾼들이 일시에 호응하여 시가를 행진할 때 의기는 당당하고 함성은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였다. 이

                  때 황급했던 일경 10여 명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폭력 저지하였으나 흥분한 군중들을 막지 못하게 되
                  자 주모자인 유진홍·이성구 외 5명을 체포하여 오산 주재소로 구인하였다. 겁에 질린 시위 군중들

      오산시사        은 잠시 해산하였다가 다시 오후 4시쯤 7~8백 명의 무리로 불어난 가운데 주재소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검거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리는 조국을 찾는 사람이다. 아무 죄가 없다. 속히 석방하라.”는 함성과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제

      6           부르고, 한편으로는 당시 면장 유종렬(劉鍾烈)이 만세운동에 협조하지 않음을 분개하여 타살해야 한
      권
                  다고 위협하자 인심이 흉흉해진 것을 보고 놀란 일경은 시위 군중들이 해산하는 것을 조건으로 주모
                  자를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유진홍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석방되자 시위 군중들은 이들을 옹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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