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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유희훈(兪喜勳)
1915년 12월 4일(음력) ~ 1971년 1월 20일(음력)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오산시 서랑동 110번지에서 아버지
유경식과 어머니 오학근의 삼남일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6.25전쟁후 세마대중건사업, 유엔군참전기념사업,
화성문화원 창립 등에 헌신한 사회사업가이다. 선생은 한학
을 글방에서 공부했으며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국내에 돌아
와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 취직하여 서울에 살다 6·25전
쟁이 발발하자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무너진 역사를 다시 빛내고 민족정기
앙양에 지침이 되기를 기원’하며 1954년 9월 세마대중건에
착수하였다. 1955년에 세마대재건추진대 및 농악대를 결성
하고 본격적인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농악대의 활동으로 오
산면, 안용면, 태장면 일대에서 기금을 모으고 구황실에서 화산릉 임목을 기증받았고, 그해 5월에는
손원일 국방장관, 엄홍섭 육군공병감, 제209 공병대 등의 협조로 세마대 주변 통행로 공사에 착수했
다. 그리고 드디어 6월 8일에 독산성세마대고적중건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이후 화성
군 내 행정, 교육, 경찰 공무원과 오산중·고등학교, 금융조합 등이 모금에 참여했으며, 선생이 서울
방송국을 통하여 세마대의 유래와 중건배경을 설명했다. 8월에는 세마대 상량식이 거행되었으나 9
월에 자금난으로 부득이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해 12월에 농악대의 2차 활동으로 심기일전하여 기금
을 모금하고, 1956년에 5월과 6월에 경기도와 오산면의 보조금을 지원받았으며, 그해 말에 화성군과
수원시의 시민, 관계기관, 각종 조합 등으로부터 기금을 후원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957년 7월에 문
교부로부터 국비보조를 받아 드디어 8월 15일 세마대 준공에 이른다.
세마대 공사비는 본 공사비 434만1,370환, 부수 공사비 272만5,000환으로 합계금액 706만6,370
환의 사업비가 소요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먹을 것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실정에서 민족정기 앙양을
목적으로 무모하다시피한 도전으로 이뤄낸 성과이다. 독산성세마대고적중건위원회의 왕성한 활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집무를 보던 경무대까지 알려져 이 대통령의 80회 생일에 초대되어 농악대가 공연
했다. 이 대통령도 세마대 중건에 관심을 많이 가져 준공 시에 친필 현판을 내려 지금도 세마대 가운
데 자리 잡고 있다.
오산시사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백마를 백미로 목욕시키는 묘책으로
왜군을 물리친 유서 깊은 산성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이곳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제 군대의 요새로 만들었다. 이후 정조 때에 세마대를 중수하여 내려오던 것을 1910년 경술국치 후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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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인들이 세마대를 파괴하고 독산성 안을 황폐화시켰었다. 이에 후손들이 전쟁의 상흔이 걷히기도 전
에 힘을 모아 세마대를 중건하게 된다. 선생은 위원장으로서 성심을 다해 사업을 추진하고, 시민들이
334 뜻을 모아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