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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괄도 그 피해자의 하나였다. 1624년 1월에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 339
우(李佑) 등은 이괄과 아들 전(栴),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 구비전승
언(李時言)이 불측한 생각으로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이괄이 북방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성책을 보수하며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을 때 중앙의 집권 · 민속
세력은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반정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 경기도당굿과
갖고 있지 않았던 이괄은 집권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이 되었고, 또한 북방수비대의 주력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있는 그의 군사력이 집권세력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이괄과 자신들의 반
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집권세력의 역모 고변이 올라왔다.
경기재인청
인조는 이괄을 신뢰하여 역모의 고변을 “이괄은 충의스런 사람인데 어찌 반심을 지녔겠는가. 이것
은 흉악한 무리가 그의 위세를 빌리고자 한 말이다.”(인조 2년 1월 21일), “이괄은 충의스런 신하인데
어찌 두 마음을 품었을 리가 있겠는가. 흉악한 무리의 근사하지 않은 말만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 성씨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 흉악한 사람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다.-중략-부원수의 직임은 · 인물
이괄이 아니면 맡을 수 없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인조 2년 1월 22일)며 물리쳤다.
이렇듯 인조는 이괄에게 무한 신뢰를 보냈고, 조사결과 역모의 고변이 무고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김류 등 집권세력은 이괄과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국문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에 인조는 이괄의 아들 전과 한명련을 압송하여 국문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고 기
자헌 등 중앙관료 40여 명을 역모 혐의로 하옥시켰다. 이괄의 군영으로 피신해있던 아들 전을 압송
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 등이 영변에 도착하자 분노한 이괄은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괄은 고문에 못 이겨 아들이 모반죄를 뒤집어쓰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조정
의 사자(使者)들을 목 베고 반란을 일으켰다.
북방수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집권세력의 모함에 분노한 것이다. 이때 같
은 역모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구출하여 1만2천 명의 정병과 100여 명의 항
왜군(降倭軍)을 선봉으로 삼아 1624년(인조 2) 1월 22일 서울로 진격했다. 이것이 ‘이괄의 난’의 시작
이다.
관군을 수차례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를 왕으
로 추대했다. 인조와 집권세력은 한양이 함락될 위기가 닥치자 공주로 피난 가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버리고 도망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아 도성인 한양을 왕과 대신들이 다시 버리고 도망가
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집권세력은 공주로 도망가기 전에 반란군과 내응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로 기자헌 등 옥에 갇혀있던 수십 명의 대신들을 처형시켰다. 한편 군사들을 재정비하고 이괄을 쫓아
온 장만은 정충신, 남이흥의 의견을 따라 서대문 밖의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이괄의 군사를 유인하
고, 지형적인 유리함을 이용하여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안현전투에서 대패한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
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빠져나와 이천 묵방리로 퇴각했으나 반란군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
였다. 여기서 이괄의 부장 기익헌, 이수백 등이 이괄과 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투항하며 이괄의
난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