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5 - 제6권
P. 345
참고문헌 343
구비전승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44. 이서(李序) · 민속 · 경기도당굿과
1547년(명종 2) ~ 1592년(선조 25)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윤백(倫伯) 또는 윤중(倫中). 이자하(李自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지
(李致)이다. 아버지는 이사성(李師聖)이며, 어머니는 한유(韓維)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에 합 경기재인청
격하고,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공주목사로서 군대를
통솔하여 독산성(禿山城)으로 출병하고 왜군과 전투를 하던 중 전사하였다. / 성씨
참고문헌 · 인물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오산학연구 5집.
45. 이성구(李成九)
1895년 2월 12일 ~ 1973년 1월 7일
수원군 일형면(日荊面) 조원리(棗園里) 사람이다. 1919년 3월 29일의 오산장날을 이용하여, 김경도
(金敬道)·이규선(李圭璇)·유진홍(兪鎭鴻)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5
시경 3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오산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본인 경찰 오오끼(大木
喜市)가 출동하여,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던 유진홍과 안낙순(安樂淳)을 강제로 주재소에 연행
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김경도와 함께 시위
군중을 대표하여 일본 경찰과 담판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선생은 다시 5백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장 유
종렬(劉鍾烈)에게도 같이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해산을 종용하자,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 기
물을 파괴하였다. 다시 우편소로 가서 이규선과 함께 전화통을 파괴하고 부근의 일본인 주택을 파괴
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
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59∼16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43∼3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