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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燕山君日記, 해평윤씨 족보.
40. 이괄(李适)
1587년(선조 20) ~ 1624년(인조 2)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1587년(선조 20)에 태어나서 1624년(인조 2) 이천 묵방리(墨防里)에서 죽었다. 무
신으로 인조반정에 공이 컸으나 ‘이괄의 난’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했다가 관군에 패해 38년의 생을 마
감하는 인물이다. 오산에는 이괄과 관련하여 금암동에 ‘장군마당’, ‘장군바위’ 등의 지명과 세교동에
‘허총(虛塚)’이 있었다고 한다.
이괄은 어려서부터 장수의 기질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 1599년(선조 32)에 선전관이 되어 도망
가는 항왜(降倭)를 잡아 참수하고, 같은 해에 명천현감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13세였다. 이후 1603
년(선조 36)에 제주도 대정(大靜)이 되었으며(17세), 1606년(선조 39) 형조좌랑(刑曹佐郞 20세), 1607
년 (선조 40) 태안군수(泰安郡守 21세), 1607년(선조 40) 경성판관(鏡城判官 21세), 1610년(광해 2) 영
흥부사(永興府使 24세), 1616년(광해 8) 제주목사(濟州牧使 30세), 1622년(광해 14) 북병사(36세)를
제수받았다.
이처럼 이괄은 어린 나이에 출사하여 북방과 남방의 최고 군사 요충지를 지휘하는 장수로 성장했
다. 1623년(인조 1) 3월 북병사에 제수되었는데 떠나지 않고,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
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인조반정에 가담해 큰 공을 세웠다. 1623년(인조 1) 한성
부윤, 좌포도대장으로 제수되었던 이괄을 6월에 인조는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하고 북
방의 오랑캐를 막도록 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일어나는 시기로, 조선의 북방은
전운의 그림자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때문에 북방을 방어하기 위해서 조선은 최고
의 장수를 보내 국경을 방어해야 했다. 이 자리의 적임자가 이괄밖에 없다고 왕이 인정한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반정세력들은 계파별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세력은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괄은 반정 당시에 공이 매우 큼
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이 된 데는 인조반정을 일으킨 주축세력과 동지적 유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
던 것으로 보인다. 반정 직전에야 비로서 반정세력이 이괄에게 반정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오산시사
명·청 교체기의 중국이 혼란스럽고 후금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은 당대 최고의 장수
인 이괄에게 북방의 수비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북방수비대의 병력은 약 1만 5천여 명 정도였는데,
제 그 중 주력부대인 1만여 명은 영변에서 부원수인 이괄이 이끌고 있었고, 지원 부대 5천여 명은 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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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수 장만의 지휘 아래 평양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력부대 1만여 명을 지휘했다는 것은 실질적인 조선
북방수비의 핵심적 역할을 이괄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338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해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 반역음모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