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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반란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비록 3일 천하를 열었지만, 이천 묵방리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도성인 한양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을 세웠던 유일한 인물이 이괄이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기에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1592~1598년)의 발발로 질곡과 고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란 극
복과 명·청 교체기의 중국 상황을 관망하며 중립외교를 펼치고 있던 광해군을 폐위하고 반정에 성
공한 인조가 즉위(1623년)한다. 그리고 1년 뒤 이괄의 난(1624년)이 일어나고 3년 뒤인 1627년 정묘
호란이라는 전란을 겪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9년 뒤엔 병자호란(1636~1637년)의 병화를 입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과 40년도 안 되는 동안 반정과 수차례에 걸친 변란을 치렀고, 두 번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는 질곡의 역사가 펼쳐졌다. 전쟁과 반란의 시대의 한가운데 ‘이괄의 난’이 자리
하고 있는 것이다. 이괄은 실패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전설이 많은 곳에 남아있다. 전국
적인 분포를 갖고 있는 이괄과 관련한 지명과 전설은 서울에 ‘말죽거리’, 충청북도 보은의 ‘이괄바우’,
충남 공주시 ‘조왕동’,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에 ‘용우물’ 등이 있고 강원도 홍천에서는 산신으로 받들
어지기도 하고, 무려 16개의 지명 관련 설화가 분포하고 있다. 또한 아기장수, 청개구리 이야기와 풍
수지리 사상을 바탕으로한 이괄 부친의 무덤이야기가 있고, 우리가 좋아하는 떡인 ‘인절미’의 유래도
이괄의 난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오산시에도 금암동에 ‘장군마당’, ‘장군바위’, ‘말무덤’, ‘말우물’ 등이 이괄과 관련된 지명이
며, 세교동에 이괄의 가짜 무덤 즉 ‘허총(虛塚)’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전설, 설화를 많이 가지고 있
는 것은 이괄이 비록 반란에 실패해 서른여덟의 나이에 죽고 말았지만, 열세 살에 벼슬길에 올랐으
며, “이괄이 아니면 북방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라고 인식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였기 때문이다. 그
리고 이괄 설화에는 민중의 소망이 깃들어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를 활용하여 영웅의 좌절
을 이야기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당대 백성들은 이괄을 아기장수와 같은 인물로 여겼으며, 그가 반
란에 성공했다면 백성이 원하는 세상이 왔을 것이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즉, 설화 속에서 ‘이괄의 난’
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할 희망의 몸짓으로 상징화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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