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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최충(崔冲)
984년(고려 성종 3) ~ 1068년(고려 문종 22)
고려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충신이다. 본관은 해주(海
州)이고,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
회재(放晦齋)이다. 온(溫)의 아들이며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에 공자(孔子)와 견주어 해동
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005년(목종 8)에 문과
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습유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
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
을 겸해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우보
궐·기거사인·중추직학사를 역임하고, 1025년(현종 16)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에 올
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에 이어 동지중추원사가 되
어 『설원(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 6
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뒤 형부상서 중
추사로 전임되었다.
정종 초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로 『현종실
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
使)로 영원·평로 등에 진을 설치하였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에 올랐고, 수사도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
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율령서산을 정했고, 곧 수태보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
으로 도병마사를 겸하자 서북 주, 진의 공역 금지를 청해 시행하게 했으며,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1055년(고려 문종 9) 내사령이 되었고,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
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받았다.
최충이 활동하던 문종 초기는 거란의 침입과 전화가 아물고서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중앙 정부가
교육까지 돌아볼 여력은 없었다. 중앙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유명무실한 상태였고 지방의 향학은
갖추어지기 이전이었으므로 교육에 대한 새 바람이 절실하던 때였다. 서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학
오산시사
은 최충이 세운 구재학당에서 시작되었다. 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
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
제 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의 학당은 금세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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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장소를 송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인근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넘치는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구재학당이었다. 이 때문에 최충의 교육사업은
356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그의 도중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또 이것을 모방해 개경에 11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