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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게 되었다. 357
이들 12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구비전승
지내고 유학에 힘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해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 나갔다. 그중
에서도 공의 도가 제일 먼저 이루어지고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루어, 그는 한국사립학교의 · 민속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 · 경기도당굿과
행으로 출세했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인데, 이것은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
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居頓
경기재인청
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
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성씨
공이 배향된 문헌서원은 원래 황해도 해주에 있으나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오갈 수 없는 형편이라 · 인물
후손들이 1985년 공의 탄생 1,0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술 심포지움 및 연구논총
의 발간과 문헌서원의 남한 땅 창건계획에 의하여 여러모로 입지조건이 좋은 오산시 내삼미동 753번
지에 부지를 조성하고 1991년 영정각과 문헌서원이 준공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 세교지구 개발
로 인해 현재는 영정각만 남아있다. 2018년에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해동공자최충기념사업회와 정
통 문학단체인 (사)한국문인협회 오산지부가 함께 선생의 교육사랑과 도덕적, 사회적 인성을 고양시
키고, 시문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최충문학상>을 제정했다. <최충문학상>은 매년 초·중·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국공모전으로 운영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補閑集. 오산시사 2009. 朴性鳳, 高麗時代의 儒學發達과 私學十二徒, 史叢 2, 1957.
60. 한두유(韓斗愈)
1632년 (인조 10) ~ 1679년(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자는 중명(仲明)이며, 종부시첨정 응문(應文)의 증손
으로, 할아버지는 수운판관 경생(慶生)이고, 아버지는 유량(有良)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
로 참판 경헌(景憲)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추천을 받아 참봉에 임명되고, 이어 봉사로 승진되었다. 숙종비 인경왕후(仁敬
王后)의 의친(懿親)으로 종부시주부·호조좌랑을 역임하고 진안현감이 되었다. 진안현감 시절 특별
히 정치를 잘하여 현민들이 모여들어 북을 치고 춤을 치며 그 덕을 칭송하였다. 그 뒤 김천군수에 제
수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치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뒤에 이천, 풍덕의 부사로 옮겨졌으나, 김
천 고을 백성들이 계속 김천에 머물러 줄 것을 진정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