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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0. 18세기 이후 수원부 장시 현황                                           171

                   『동국문헌비고』      장시명                        鰲山場      邑內場      八呑場      石峴場      安中場               역사
                          74)
                     (1770년 )    개시일                         3·8      1·6     5·10      2·7      1·6               /  유적
                    『임원십육지』      장시명     北門外場     南門外場      烏山場
                      -1830      개시일      2·7       4·9      1·6                                                  · 유물

                     『화성지』       장시명              南門外場      烏梅場      細籃場      八灘場      石峴場      安中場
                      -1831

                     『여도비지』      장시명              南門外場      烏梅場      細籃場      八灘場      石峴場      安中場
                    (1853~1856)  개시일                4·9      3·8      1·6     5·10      1·6      2·7

                     『대동지지』      장시명              南門外場      烏山場      細籃場      八灘場      土津場      安中場
                      -1863      개시일                4·9      3·8      1·6     5·10      1·6      2·7

                    《수원부지도》      장시명              南門外場      烏山場               發安場               安中場
                      -1872

                    『수원군읍지』      장시명              南門外場      烏山場               發安場               安中場
                      -1899      개시일                4·9      3·8              5·10               1·6




                    장시의 개설은 조선후기 교통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름길과 샛길이 개척되면서 곳곳에 점막이나
                  주막이 등장하는 요인이 되었다. 주막은 시장의 발달과 함께 백성들의 휴식처로서 주점(酒店), 술막,
                  숫막, 여점, 야점, 점막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주막은 대체로 장터 부근,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중간지점이나 길목, 배가 닿는 나루터 등에서 운영되었다.                  75)
                                                                                                     76)
                    주막의 기능은 여행객이나 상인 등의 손님에게 술이나 밥을 팔거나 숙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한 주막에서는 소규모의 상거래가 이루어지거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동시에 지역민
                  들에게는 막걸리로 목을 축이거나 잠시 쉬어가는 휴식공간인 유흥의 장으로도 이용되었다. 규모 역

                  시 다양하여 비교적 작은 곳에서는 주모가 직접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들거나 손님들의 시중을 담당하

                  였다. 이와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나 규모가 큰 물품을 거래하는 대상(大商)들이 머
                  무는 주막도 등장하였다.
                    조선후기 상업이 활성화되고, 물자의 유통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장시길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 곳곳에 주막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청호역의 주막이 확인되는 시기인

                  정조대에는 전국적으로 주막이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안변과 평강 사이에는 8~9개의 점촌(店村)이
                                                                                    77)
                  형성되었는데 이곳에 근거지를 둔 민호가 수백 가호에 이를 정도라고 하였다.  또한 황해도 금천(金
                  川)은 읍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병전촌(餠廛村)이 형성되어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점막이 늘어






                  74) 『도로고』는 『동국문헌비고』와 동일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75) 최영준, 『嶺南大路』,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90, 306~316쪽.
                  76) 김대길, 「조선후기 장시 발달과 사회·문화 생활 변화」, 『정신문화연구』 35, 2012, 99쪽.
                  77) 『승정원일기』 1634책, 정조 11년 9월 29일(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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