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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상인과 여행객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막의 성장 173
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진위현 지도에는 ‘청호주막(靑好酒 역사
幕)’이 확인된다. 이후 주막의 기능과 필요성이 확대됨에 따라 고종 9년(1872)에 제작된 지방지도에는 / 유적
주막과 관련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산 역시 청호역을 중심으로 장시가 활발히 운영되
면서 주막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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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 외에 19세기 수원부에서 운영되었던 창(倉)도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수원부의 쌀과 잡
곡을 관리하던 11개의 창(倉)은 성내의 내창(內倉)과 기타 지역에 위치하는 외창(外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내에 일창·이창·광주창·용인창이 설치되었고, 성 밖에 용주사의 삼창, 독산성의 사창과
오창, 상홀면 일대의 육창, 청룡면 일대의 칠창, 공향면 일대의 팔창, 우정면 일대의 구창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림 13. 수원부 읍내와 창-《광여도》(18세기 중반) 그림 14. 독산성의 사창·오창-《1872년 수원부지도》
창은 일창부터 구창까지 총 9개와 별도로 광주창과 용인창이 있었지만 유수부로 승격되기 이전에
는 6개의 창이 운영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을 전후로 간행된 지리지에 의하면 수원부의 창은 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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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倉)·직산창(稷山倉)·설창(設倉)·양성창(陽城倉)·해창(海倉)·쌍부창(雙阜倉)이 확인된다.
수원 이읍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부읍지』에는 18세기 지리지에서 확인되던 6개 창 가
운데 양성창과 직산창이 사라지고, 부내(府內)의 사창(司倉)과 독산성의 산창(山倉)을 포함하는 6개
의 창이 기록되어 있다. 신읍 조성 이후의 창고는 부내의 사창(司倉) 47칸, 독산성의 산창(山倉) 26
82) 김선희, 2016, 「화성유수부의 창고(倉庫) 운영」, 『수원학연구』 11, 수원학연구센터, 53~59쪽.
83) 《여지대전도》(1700), 《해동여지도》(1735), 《해동지도》(1750), 《광여도》(1767~1776), 《경기도지도》(18세기 중엽), 《지승》(18세기 후반) 등의
지리지에는 모두 ‘議倉’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나 『수원부읍지』의 경우 ‘設倉’로 기록하고 있다. 본고에서 ‘설창’으로
보고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