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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게 되자 이곳으로 참(站)을 옮길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78)
                    조선 후기 주막의 증가 요인 중 하나는 각 지역마다 과거시험이나 백일장의 횟수가 많아지고 있었

                  다는 것이다. 당시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하루 이틀 이상을 이동하였다. 또한 시험기간 자체가
                  2일~5일이 소요됨에 따라 이동기간과 시험을 치르는 기간 동안 숙소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79)
                  관심거리였다.  이에 지인이나 친척의 집에 유숙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인근 주막이나 점막에
                  숙소를 정하게 되었다.



































                                              그림 12. 청호주막-《해동지도》(1750년대)


                    또한 주막이나 점막은 암행어사나 위유사(慰諭使) 등이 민정을 파악하고 각종 시책을 홍보하는 곳

                  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정조대 충청도에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점막은 면포의 기한을 물려주거
                  나 대납[停代]해준다는 내용의 진서(眞書)와 언문(諺文)을 게시하도록 명하고 이를 점검하였다. 그리

                                                                                       80)
                  고 윤음(綸音)이나 정령 등 각종 홍보 내용을 알리고 게시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고종대에는 중앙
                  에서도 각종 절목(節目)을 경기·삼남(三南)·해서(海西)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읍의 촌리(村

                                                             81)
                  里)와 장시에 한문과 언문으로 게시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주막이나
                  점막을 대민정책을 알리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던 것이다.
      오산시사
                    조선 전기 과객의 왕래가 많았던 오산 일대는 18세기 이후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가의 관리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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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           78)  『승정원일기』 1775책, 정조 21년 4월 16일(병술). - 황해의 금천과 마찬가지로 현재 화성시에는 ‘병점[餠廛]’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사용되
                    고 있다. 당시 오산의 청호역과 멀지 않다는 점에서 청호의 주막과 함께 성행했던 주막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9) 전경목, 「조선 후기 지방유생들의 수학과 과거 응시 권상일의 淸臺日記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2007년, 288~299쪽.
                  80) 『일성록』 정조 18년 12월 4일(정사). / 정조 19년 1월 4일(정해).
    172           81) 『승정원일기』 2715책, 고종 4년 6월 11일(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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