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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유적
제4장 남북국시대의 유적과 유물 · 유물
강정식 | 한신대학교 박물관 연구원
제1절 신라·통일신라 유적의 구분
신라가 오산지역에 진출하는 시기는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 시점인 553년(진흥
왕 14년) 이후로 추정되며, 오산 각지에서 발굴조사된 내용을 통해 보았을 때 대략 6세기 후반경으로
보고 있다. 이후 별다른 외침 없이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하는 시기까지 신
라의 영토로 존속하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을 신라와 통일신라로 구분하기 어려운 편이다. 특히 자연
과학적 시료 분석방법인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유적의 경우 출토된 유물만으로 시
기를 구분해야 하지만, 실제로 출토되는 유물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7세기 이후 유물의 편년체계
가 아직 정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이를 해석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따라서 제3장에서
는 6~7세기대에 조성된 것이 확실한 유적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일부 7세기 후반까지 존속하는 유
구도 포함하였다. 본 장에서는 8세기 이후에 조성된 유적만을 대상으로 한다.
시대 명칭은 통상 나당전쟁 이후를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로 지칭하고 있는데, 역사적인 관점
에서 보았을 때 ‘남북국시대’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를 ‘신라 중·하대’, ‘신라 중·하고’, ‘신라 후기’ 등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지만,
고고학적인 물질자료를 통해 위의 개념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통합한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여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의 개
념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맥락으로 구분하기에 어려운 유적이 존재하는데, 바로 오산의 대표적 유적인 ‘독
산성’이다. 현재까지 독산성에 대한 조사 및 연구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축성된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
기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최근 발굴조사 결과도 이에 부합하는 근거자료
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특정 시대에 속한 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므로 고
고학조사를 통해 확인된 해당 시대의 유구와 유물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자세한 내
용은 제6장에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