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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세교 4, 5지점 원삼국-백제 분묘의 구조

                                               4지점        5-1지점       5-2지점       5-5지점         계
                                  목관묘           31          49          18          43          141
                                 이중목관묘          0           2(?)        2           0           4
                                  목곽묘           0           1           1           0           2
                      周溝墓
                                  토장묘           4           3           0           2           9

                                   불명           0           12          0           2           14
                                   소계           35          67          21          47          170
                                  목관묘           26          40          8           21          95
                                  목곽묘           2           0           0           0           2

                                  토장묘           1           14          1           5           21
                     무주구묘
                                  옹관묘           0           1           0           0            1
                                   불명           2           7           1           4           14
                                   소계           31          62          10          30          133
                             합계                 66         129          31          77          303






                    백제는 이웃한 마한 정치체들을 통합하고 때로는 군사적인 정복도 감행하였지만 주로 한성 중앙에
                  서 제작한 위세품이나 외부에서 수입한 기성품을 나누어주며 회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고난도의

                  기술이 발휘된 특수한 토기나 금속제품, 중국제 도자기나 장신구 등이 이러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지역 수장층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중앙 권력과 연결되어 있음을 과시하면서 집단 내부에 대한 통제
                  력을 높이거나 이웃한 경쟁자를 견제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도자기의 분여
                      21)
                  이다.  서울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의 도성유적과 석촌동고분군에서는 西晉에서 劉宋代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도자기류가 출토되었고 지방에 해당되는 원주 법천리, 천안 화성리와 용원리, 공주 수

                  촌리, 서산 부장리, 익산 입점리, 고창 봉덕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정작 경기도 지역에서는 개성 출
                                                                                            22)
                  토라고 전해지는 서진 만기-동진 초기의 청자 호자 1점 이외에는 알려진 예가 없었는데  수청동 25
                  호묘에서 동진대에 해당되는 청자 반구호가 발견됨으로써 중국 도자기를 매개로 한 백제 중앙과 지

                  방 수장층의 우호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청자 반구호와 성시구를 부장한 25호묘 피장자, 은상감환두도와 성시구를 부장한 14
                  호묘 피장자는 백제 중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인 셈이다. 25호묘 피장자는 동진제 청자
      오산시사
                  와 중앙산 성시구 이외에도 원저단경호, 등자, 재갈, 십금구(띠장식) 등을 부장하였다. 이러한 물품들




      제
      2           21) 權五榮, 1988, 「4세기 百濟의 地方統制方式 一例 -東晉靑磁의 流入經緯를 中心으로-」 『韓國史論』18,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권              成正鏞, 2003, 「百濟와 中國의 貿易陶磁」 『百濟硏究』3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李漢祥, 2004, 「위세품으로 본 한성백제의 중앙과 지방」 『한성기 백제고고학의 제문제(Ⅱ) -백제의 중앙과 지방-』, 서울경기고고학회.
                  22) 이 유물은 정식 발굴품이 아니란 약점이 있다.
                     권오영, 2001, 「伯濟國에서 百濟로의 轉換」 『역사와 현실』40, 한국역사연구회.
     80              국립중앙박물관, 1999, 『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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