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전시가이드 2024년 04월 이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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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서장대 머리초의 곱팽이 문양                박생광 <무녀>, 136×140cm, 종이에 채색,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건희 컬렉션



                  나선형 문양의 원형은 팔메트에서 시작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형, 발전되어 이집트, 그리스, 시베리아, 중국, 북유럽, 중남미, 남태평양 등
                   동서양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 동양으로 건너 오면서 북방으로는 중국과 한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며
                                      단와문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당초형 문양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였다.




            1862~1918)는 수많은 작품에서 곱팽이 문양을 흔하게 사용하였는데 특히 <    그가 처음부터 이러한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1904년 예향(藝鄕)인 경남
            생명의 나무(Tree of Life)>, <기대(Expectation)>, <성취 (Fulfillment)>등의   진주에서 태어나 일제 시대인 1920년 16세의 나이로 일본 교토(京都)에서 유
            작품에서는 곱팽이 문양을 특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학생활을 하며 화업을 수련하는 시기를 거쳤다.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고
                                                            향 진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전개하다가 1974년 다시 일본 도쿄(東京)로 가
            우리 화단에서는 독보적으로 박생광(朴生光, 1904~85)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    서 일본 화단에서 활동을 하였고, 1977년이 되어서 73세의 나이로 서울로 돌
            인 <명성황후>, <전봉준>, <청담대종사> 및 <무녀>, <십장생> 등과 단청을   아왔다. 이때부터 새로운 화풍의 변화가 감지되는데 <단청기둥>,  <토기와 단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 곱팽이 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을 필시 그     청>,  <단청>이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단청의 안료나 민화에 쓰이는
            냥 그리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연유를 살펴보자면 '속정(俗情)을 떠나지     분채, 그 밖의 재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채색 기법으로 단절된 채색화의 전
            못해 중이 못 되었다'라는 그의 말에 비추어 불교와의 깊은 인연을 떼려야 뗄      통을 이어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수 없을 것 같다. 유년 시절부터 청담대종사와는 진주제일보통학교와 진주공
            립농업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고, 청담의 일본 유학도 주선해 주었다는 것으       1977년 6월 그의 <흑모란> 작품을 좋아하는 후배를 만나게 되면서 말년에 해
            로 볼 때 아무래도 불교와의 인연이 매우 깊어지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하는 1979년부터 절실하게 그리고자 싶어했던 작품을 본격적으로 그리는
            단청을 소재로 그린 작품에 대한 박생광의 생각을 살펴보면 '촉석루가 있는 유      절정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곱팽이 문양이 작품 곳곳에서 만개하였다. 특히
            서 깊은 곳에서 논개(論介)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민족을 생각하고, 고색창연       <담장위의 참새>, <가야금과 부인>, <지장보살>, <꽃기둥>, <무녀> 등의 작
            한 원색 단청을 늘상 생각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내 그림의 세계       품에서는 곱팽이 문양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가 펼쳐진 것 같다'라고 하며 '샤머니즘의 색채, 이미지, 무당, 불교의 탱화, 절
            간의 단청, 이 모든 것들이 서민의 생활과 직결되어지는 그야말로 그대로 나       이러한 작품의 탄생에 일조를 한 사람은 다름아닌 <흑모란> 작품을 좋아한
            의 종교인 것 같다'라고 생전에 했던 말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단청스   후배인 이영미술관 김이환 관장이었다. 그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고 이렇게
            케치> 같은 습작을 통해 단청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면밀한 연구가 그 바탕       시작된 작품들이 용인에 하나씩 둘씩 모이기 시작해서 미술관을 세우게 되었
            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으며, 그렇게 모인 작품들로 인해서 아마도 박생광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
                                                            한 미술관이 된 것이라 추측된다.
            불교를 주제로 그린 작품들은 종래의 불교 미술에서 바라보면 매우 파격적
            인 표현 방식으로 기존의 구상성을 탈피하였지만 전통 불화의 표현방식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이환 관장께서 지날 3월 11일 먼 길을 떠나셨다. 2월 4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고 불보살의 상호나 단청에서 쓰이는 문양, 즉 머리       일 짧은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여쭐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꿈
            초나 곱팽이 문양 등은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토대로 새롭게 변용하         에도 생각을 못했다. 박생광의 작품을 보러 용인에 있는 이영미술관을 찾을
            여 그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보다 깊고 폭넓게 펼쳐 나간 것      때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며, 도록에 친필로 사인을 해주시던 김이환 관장님의
            이라 생각된다.                                        인자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간의 후의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김이환 관
                                                            장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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