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PHOTODOT 2018년 5월호 VOL.51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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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




 진솔하게 담아내려고 했다. 재일조선인과 이들의 차별에 불합리성을 인식하  일대가 평화공원으로 조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진행했던 작업이다.  에 대한 본질을 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  역에서 만난 증오비의 대부분은 한국군에 대한 참혹한 만행에 관한 내용과
 고 그들의 삶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  한 본질들에 대해 속 깊게 논의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논의할 것을 논의  죽은 이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이 사건을 천대 만대 기억하고 잊지 말자는
 탄을 투하한 후 일본 천황은 항복을 선언하자 전쟁준비를 위한 모든 건축물  《잃어버린 기억》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해 양국의 생산적이고 현실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진지한 방법에 대해 고민했  말과 함께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반면, 국내에
 과 탄광채굴 및 군수물자를 보관하기 위한 동굴 등 모든 공사를 중단하게 된  국내에 남아 있는 일본 잔재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던 중 알게 된 경산 코발  으면 한다. 아직 진행 중인 이 작업은 마무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방향  건립된 사전적 의미의 기념비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호국영령들에 대한
 다. 전쟁이 끝 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석탄 채굴을 위해 식민지 조선인  트 민간인학살 사건의 현장과 유가족을 만나게 되면서 관심을 끌게 되었는  을 제시하는 밑돌의 역할로 활용되고 사용되었으면 한다.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비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전쟁의 현장에 세워
 들이 강제노역을 당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억압을 받았던 후쿠오카현의 치  데 그 현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진 베트남의 증오비와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 세워진 기념비는 전쟁을 기억
 쿠호 지역은 참혹했다.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산을 요새화한 히로시마  1950년 한국전쟁 직후(7, 8월) 경북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동굴과 주변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작품에 등장하는 증오비(憎惡碑)와 기념비(記  하는 방식과 형식이 다르지만 같다.
 의 쿠레 지역의 동굴은 전쟁준비를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듯 소름   일대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사진집을 만들고자 했  念碑)에 대해서 궁금하다.
 끼치도록 공포감을 느꼈던 곳 중 하나였다.  다. 유가족 증언을 통한 10명의 인물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작  7년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한국군 민간인학살 지역의 주면(생존자), 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작업과정에서 한국 사진가로서 베트남 촬영은
 품집 책 출간을 앞두고 심리적 부담감을 느낀 일부 유가족으로 인해 결국 2  령비, 증오비와 동시에 그에 대비되는 한국의 참전기념비, 충혼탑을 촬영했  많은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다. 가장 힘든 경험은 무엇이었나.
 《잃어버린 기억》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의 여름, 경산 코발트광산  명이 빠지게 되었다. 부끄러운 역사는 숨기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  다. 베트남에 갔을 때 어느 마을 입구에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었다.   증오비와 위령비 촬영 현장에는 매번 베트남 현지 주민들이 신기한 듯 둘러
 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사진이다. 12년 동안 작업  업은 서글픈 우리들의 역사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  선다. 별다른 반응이나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빛과 행동에서
 한 것으로 아는데 촬영 과정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한 것이고 나아가서는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삶을 지켜나가려는 몸부림이다.   “하늘에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이 학살에  는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베트남 꽝아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의 현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서 희생된 자의 수가 총 430명이며, 그중 268명은   이성 빈호아 마을에서 실제 겪은 일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마을 한가운
 안전한 보호구를 착용하고 들어간 동굴 입구는 광산 내부에서 흘러나온 물  베트남의 증오비와 한국의 기념탑을 중심으로 작업한 《하나의 전쟁, 두 개  여성, 109명은 50세에서 80세까지 노인, 82명은 어  데 큰 나무가 한그루 있고 주변에 어른들과 아이들이 위령비 근처에서 놀고
 로 가득 차 있었다. 목이 긴 장화에 차갑게 전해져오는 동굴 내부의 물은 섬  의 기억》 사진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린이, 7명은 임신부였다. 2명은 산 채로 불에 던져  있었다. 간단하게나마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주변에는 어린아이들이 신기
 뜩했다. 내 외부의 온도 차로 카메라 렌즈는 뿌옇게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베트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   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함과 안타까움 마음에 가지고 있던 막대 사탕을
 않았다. 이 사건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  전쟁(1946년~1954년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 독립전쟁) 이후 분단된 베트남  졌으며, 1명은 목이 잘렸고, 1명은 배가 갈라졌으며,   주었다. 그중 한 아이는 받지 않았다. 우리가 행동이 악의가 없던 것을 안 것
 지 꼭 생각해야만 하는 사건임을 새삼 주지한 시간이었다. 단렌즈와 줌렌즈,   의 독립과 통일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개입한 전쟁이다. 한국군  2명은 강간을 당했다. 2가구는 한 명도 남김없이 몰  인지 마을 어른이 거들었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싫어요! 한국 사람이잖아
 광각과 망원렌즈를 사용했다. 흑백 필름으로 작업해 직접 현상과 인화를 했  은 8년 8개월 동안 참전했다. 5,077명이 전사했고 10,962명이 고엽제 후유  살당했다.”  요!”라며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순간 몹시 당황스러웠다. 촬영을 마무리
 다. 이곳은 한국전쟁 직후의 이념대립이 낳은 비극임과 동시에 다시는 되풀  증 환자 및 전후 부상자가 발생한 전쟁이다. 전쟁의 흔적과 상처가 있는 곳  하고 장비를 챙겨 뒤돌아오는데 그 아이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이되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교훈의 현장이다.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명예회  들에 대한 사실을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으로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이는 사  회색빛 콘크리트에 조각을 넣고 붉은색과 노란색을 입혀 새긴 증오비에 이
 복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유해발굴 및 진실규명)을 함과 동시에 코발트광산   진이 가지고는 외형적 특수성 때문으로 고소나 고발 혹은 흑백논리로 사건  렇게 쓰여 있는데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베트남 각 지  최근, 전남 목포에 있는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에서 《군함도-미쓰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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