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6 - 자치분권_본문_조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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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만남은 필자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계기가 됐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기사와 사진을 보게 됐는데 그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언론 검열이 심했던 시
                        시사잡지 ‘신동아’ 기사에서 미래의 길을 만나다                                                             절이었으니 명쾌하게 사건의 진위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틀

                                                                                                               림없이 5·18 광주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실마리를 조금씩 당겨가니 광주는 끔찍한 참상의 역사였다. 간첩,

                                                                                                               대한민국 전복세력을 소탕한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의 피를 밟고 일어

                                                                                                               선 쿠데타 정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민은 어용 언론이 만들
                        중학교를 마칠 즈음, 고향 완주에는 별달리 진학할 고등학교가 없었다.                                                 어낸 말장난에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형들을 따라 고등학교를 서울로도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좀 더 가깝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사회변혁의 일원이 되기를 꿈꾸었
                      게 막내를 두고 싶어 했던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대전으로 진학했다.                                                    다. 부정한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에 진학하기

                        지금은 많은 유명인을 배출해 명문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낯설기만                                                     까지 나의 희망 학과는 줄곧 ‘정치외교학과’였다. 그 학과에 진학해야

                      한 타지의 고등학교였다. 현재 가장 대표적인 유명인은 배우 송중기 후                                                   정치를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즉, 정치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
                      배 27기와 현 충남도지사 안희정 선배 7기이다. 또한 필자와 동종업계인                                                 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인들도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다.                                                                       이러한 성향은 일상적인 급우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났다. 덩치 큰

                        고등학교 시간은 초등학교, 중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초중학교 모두                                                   친구들이 왜소한 급우를 괴롭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소영웅심리’ 같
                      두세 학급 규모였지만 고등학교는 한 반이 60명 넘는 총 12개 반이었                                                  은 것은 아니다. 약자가 당하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친다면 그 또한 폭

                      다. 유학 온 ‘촌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깍쟁이 같던 도시아이들이 많                                                  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소위 ‘노는 애들’ 여럿이 약

                      았고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춘기였던 고등학교 시절, 낯선 환경과                                                   한 친구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 끼어들다, 때로는 그들에게 린치를 당하
                      부모님의 품은 떠난 생활 속에 일종의 정신적 방황기를 거쳐야 했다.                                                    기도 했다. 하지만 타협하지 않았다. 부당함과 타협하는 것은 사람으로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먹에 맞아 코피를 쏟을지언정 정신의 무
                        학업에 전념하기보다는 바깥세상에 관심이 더 많았다. 1983, 4년도                                                 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의 일이다. 친구를 통해 얻게 된 ‘신동아’를 보게 됐다. 이 시사잡지와





                      36     자치분권 민주주의 열매를 나누다                                                                                               민주주의 열매를 키우고 나누는 자치분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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