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자치분권_본문_조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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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를 치르고 바람대로 모 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했다. 현  “이게 내가 추구했던 민주주의와 사회변혁인가?”

 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불합격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1년 재수 후 부모

 님과 상의를 통해 법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정치를 하든 회사원  동아리의 반복되는 학습과 모임은 마치 공염불 같은 의식이었다. 대
 을 하든, 법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가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일리가   안이 없는 비판, 또 그 비판을 위한 비판. 그것은 꿈꾸던 변혁과는 거리

 있었다. 한 친구는 ‘대학 이념동아리에 가입하면 정치는 자연스럽게 배  가 멀었다.
 우면 된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원인은 1987년 민주세력의 대선 패배였다. 정치세력은 국

 푸른 꿈을 안고 시작한 대학 생활은 격동의 캠퍼스였다. 87년 6월을   민의 요구에 답하지 못했다. 광주에 이은 또 하나의 희생, 87년 6월이

 전후로 대학가는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의 도가니로 바뀌어 갔다. 박종  만들어놓은 대통령 직선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민주세력은 분열
 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의 희생 등이 이어지며 민주화의 열망은   했고 합치하지 못했다.

 들불처럼 전국에 번졌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화를 쟁취했다.
 그 무대에 함께 있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학생운동권에서는 그렇게 멀어졌고, 대학 졸업 후 모 대기업에 취직

 또 한편으로는 달동네 판자촌 같은 곳에서 철거민 투쟁에 참여하기  을 하면서 정치는 필자의 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다만 하나 못 박

 도 했다. 1987년 상계동 철거민 시위 때는 시위대 진압을 폭력으로 진  은 것은 회사생활은 오래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정한 것이
 압하는 용역이 휘두른 몽둥이에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필자의 작은 참  7년이었다. 그 정도면 전문성을 쌓을 수 있고 회사생활에 너무 매몰되

 여가 갈 곳 없는 철거민에게 힘이 된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지금  지 않을 시간이라 판단했다.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 사람은 누

 도 머리에 흉터가 남아 있지만 필자는 그것을 훈장으로 믿는다.  리고 있는 것들에 구속된다. 필자가 막연히 묻어두었던 바람은 실사구
                  시형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학생운동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다수의 친구들  필자가 따르고 싶은 정치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렇게 큰 인물

 은 헌신적이며 실천적으로 자신을 살랐지만 일부는 이러한 가치를 자  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을 따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정
 신의 안위를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력화하려는 선  치가이기 전에 사상가이기도 했다. DJ야말로 실사구시의 정치를 실현

 배, 아무런 비판 없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가는 후배. 학생운동권의   한 분이기도 하다. 서생적 비판 정신과 상인적 현실감각. 이 얼마나 시
 추악한 실체와 마주하면서 필자는 많은 한계를 느꼈다. 스스로 끊임없  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정치감각인가.

 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정치 후배에게 특히, “자신의 손가락은 이상을 가리켜야 하지만





 38  자치분권 민주주의 열매를 나누다                          민주주의 열매를 키우고 나누는 자치분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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