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죽산조봉암기록
P. 18

맥아더의 GHQ(연합국최고사령부)는 숙고 끝에 “수세기 동안 농민들을
                   봉건적 억압에 시달리게 만든 경제적 구속을 철폐하기 위해 일본 황실 정

                   부는 농사짓는 사람이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있도록 보다 평등한 기회를

                   얻도록 만드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 따라서 일본 황실 정부는 1946

                   년 3월 15일 전까지 농촌토지개혁안을 제출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것

                   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정신에 따른 것이다. GHQ는 두 차례에 걸쳐 토
                   지개혁을 실시했다. 1차는 농민들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2

                   차 개혁부터 농민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토지개혁으

                   로 200만 가구가 손실을 입었고, 400만 가구가 이득을 보았다.



                    농지는 다시는 빌려줄 수 없었으며 1950년대에 이르면 소작지의 비율이

                   10분의 1이하로 감소했다. 1947년과 1948년 사이에 있었던 토지개혁과

                   정에서 폭력사태가 110건 있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일본의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으나 이것은 일본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맥아더의 의지와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타의의 산물이었다. 대륙에서 수

                   십 년간 의도적으로 토지개혁을 회피하던 장제스 정부는 일본을 예로 든

                   설득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결국 1953년에 토지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농
                   민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국민당 지도부가 대만에

                   거의 기득권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토지개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대만 역시 일본처럼 미국의 동북아 정책의 일환으로서 미국의 정

                   책을 수용한 타의의 결과였다.







                                                                           17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