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죽산조봉암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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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 협력이 필요함은 물론이요, 당면에 있어서 양대 운동은 협동전선을
           구성할 여러 가지 일치점이 있다. 그러나 민족운동 중에는 타협적 운동을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말하여 둔다.

            (월간지 『개벽(開闢)』 제60호(1925년 6월호)




               ■  6월 하순, 조선을 떠난 조봉암은 상해에 들러 여운형을 만나고, 블라디보스
                 토크, 이르쿠츠크를 거쳐 6월 하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 도착

                 하기 전 6월 17일 조봉암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

                 회 동방부 위원 보이친스키(Войтинский)에게 전보를 보냈다. 조봉암은

                 1925년 4월 17일 창립된 조선공산당의 부대표로, 1925년 4월 18일 창립

                 된 고려공산청년회의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된 것이다. 조봉암의 방문 목
                 적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코민테른의 정식 지부로 인정받는 것

                 이었다(임경석, 2012).

               ■  8월 10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이르쿠츠크파 남만춘, 조훈과 합류했다.

               ■  8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과 고려공청을 승인받고 유
                 학생을 받아달라고 요청해 21명의 입학 승인과 공작금을 받았다.
                                                              6)
               ■  9월 3일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가 ‘조선문제’를 심의하

                 는 특별위원회 설립을 결정하는데 조봉암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

                 은 「결정서 초안에 대한 의견서」(1925년 9월)에서 국내에서 결성된 조선공




           6)  1925년 11월 조봉암의 아내 김조이와 동생 조용암을 포함한 21명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다
             (이원규, 2009: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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