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전시가이드 2023년 03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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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보도 자료는   cr ar t1004@hanmail.ne t  문의 0 10-6313- 2 7 4 7 (이문자 편집장)
                                                                전시  보도자료는  crart1004@hanmail.net  문의 010-6313-2747 (이문자 편집장)





































                                                    산의 침묵                              바늘 구멍을 통과한 낙타의 초상
                        산은 늘 그만 큼에 서 있다. 그리울 만큼만 바라보고 서 있다.                      오아시스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The portrait of a camel passing through a needles eye-Discovering ones
              Silence of the mountain-The mountain always stands there. It stands at a   own image reflected in the oasis!
                                     nostalgic distance and..say nothing                          90x7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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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의 형태는 피할 수 없다. 마치 기록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나 텍스트 그 자체
            지정연은 작업을 종이에서 시작하고 종이에서 끝낸다. 뭔가를 종이 위에 그        를 담고 있는 어떤 추상적 구조는 종이가 소재가 된 작품에서 불가피하게 드
            린다기보다는 뭔가를 종이를 사용해서 형상이나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사용        러난다. 마치 롤랑 바르트나 자크 데리다가 주장하는 에크리튀르(e’criture)
            되는 종이는 우리가 알던 그 종이가 아니라 뭔가 다른,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      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과 흡사하다. 구어와 문어 대신에 입말과 글말로 대
            은 방식으로 사용되는 종이다. 그 종이를 가공하고, 변형하며, 재구성하여 그      체하여, 입말이 글말보다도 먼저라고 하는 기존 언어학의 상식을 뒤집으면서,
            녀는 작업을 한다. 우리는 종이를 “식물성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든 얇은 물      입말을 글말의 역사적 인식적 반영이라고 주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듯이
            건, 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를 하는 데 쓴다.” 우리는 종이를     보이는 것이다. 언어 자체를 이미지로 형상화시켜서 기록되는 기호 자체가
            종이 자체로 경험하고 이해한 게 아니라, 종이를 그 용도와 기능으로서만 받       제도화의 흔적인 것이고, 이 흔적은 하나의 지시 구조, 즉 완결된 한 편의 작
            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종이가 문풍지로도 쓰이기도 하고, 옷감        품 속에서 재현된 무의미한 기호들 간의 시각적 차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나 컨테이너 용기로도 쓰이며, 건축 자재로도 쓰인다는 것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면서도 그런 정보를 예외로 간주하고 쉽게 잊어버린다. 그냥 종이        종이라는 매체는 언제나 물질적으로 분명하다. 그러나 그 매체성, 또는 물성
            란 쓰고 그리며 복사하고 출력하는 그런 것, 즉 이미지나 문자를 담는 매체       이라는 것은 비가시적인 추상이다. 한지든 그 원료가 되는 닥나무든 그 자체
            정도로 알고 있다.                                      가 스스로의 물질적 본성을 드러낼 수는 없다. 결국은 그 물질을 대상으로 보
                                                            거나 경험하는 사람들이 감정을 이입한 의인화의 결과이니까, 물성이니 매체
            지정연은 줄곧 종이로 작업을 하면서 종이의 이 일상적 기능성을 해체/탈구        성이니 하는 것은 그 물질에 대한 태도나 관념에 다름 아니다. 지정연은 매체
            축하고 그냥 물질 재료로, 오브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그녀에게 종       로서의 종이를 해체하여 물질로서의 종이로 재구성하면서 의미 없는 기호나
            이는 기록의 매체가 아니라 어릴 때 시골서 경험하던 문의 문풍지에서 비롯        물질적 흔적들이 서로 비켜나고 미끌어지게 하면서 드러나는 공간, 또는 펼쳐
            되었기 때문이다. 한지가 가지고 있는 빛의 투과성 자체가 어린 시절 경험과       지는 메트릭스를 하나의 세계로서 작품을 보여준다. 비선형적이고 우연적이
            기억을 담으면서 그녀의 종이는 기록보다는 빛과 색을 표현하는 오브제일 수        며 임의적인 의미의 세계를 예술가는 울퉁불퉁하고 촘촘하게 만들어낸다. 그
            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종이를 특정한 사이즈와 형상으로 빚기도 하고, 말      세계 속에서 지정연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삶의 경험을 그리움으로 채우기 위
            기도 하며, 불에 거슬리기도 하고, 색을 칠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일단 종이     해 시치프스적인 불굴의 노동을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리워하기
            를 작품의 소재나 오브제로 사용하는 이상은 종이라는 물성에 스며든 기록의        위한 그리움이 그녀의 작품 속에 노동의 이름으로 꽉 차 있다.
            흔적이 남아있어서 평면의 형태로나 입체의 형태로든 남겨지는 문자나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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