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2019년01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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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분쇄기(No.1)>, 1913, 캔버스에 유채, 61.9x64.5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n, 1950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샘>, 1950(1917년 원본의 복제품), 자기(磁器) 소변기, 30.5x38.1x45.7cm, Philadel-
phia Museum of Art: 125th Anniversary Acquisition. Gift (by exchange) of Mrs.
Herbert Cameron Morris, 1998 © Association Marcel Duchamp / ADAGP, Paris
– SACK, Seoul, 2018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2년 가을, 뒤샹은 회화 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
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 "나는 예술이 나쁠 수도, 좋을 수도, 혹은 그저 그럴 수도 있지만
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한 것 어떤 형용사를 쓰건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고 불러야 하고,
이다. 1913년에는 <자전거 바퀴>를 만들었는데, 이는 평범한 기성품으로 만 나쁜 감정이 여전히 감정인 것처럼 나쁜 예술역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든 예술품, 즉 레디메이드의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레디메이드는 그 무렵 따라서 내가 ‘예술 계수(artcoefficient)’를 말할 때 나는
뒤샹이 자신의 노트에 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위대한 예술만을 가리키는게 아니며 (나쁘건 좋건 그저 그렇건)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그저 ‘날것 상태(àl’état brut)’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주관적
향했고, 수집가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주변에 모인 재능 있는 예술 메커니즘을 묘사하고 있을 뿐임을 이해해야 한다."
가, 작가, 지식인 무리에 합류했다.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는 이후 뒤샹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쟁적인 오
브제가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대
중적 논의가 촉발됐다.
에로즈 셀라비 우리 욕망의 여인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다시 파리가 뒤샹의 창작 근거지가 되었다. 뒤샹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뒤샹은 자신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졌
은 이 시기 초반에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근 음을 깨달았다.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특히 필라델피아 미술
20년간 직업정신을 가지고 체스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에로즈 관은 1950년 월터와 루이즈 아렌스버그 부부가 기증한 현대 미술 컬렉션의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전하는 일부로 뒤샹의 전작 중 다수를 입수했다. 급격히 늘어난 전시, 출판, 잡지 및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이 미술에서 공학 및 기구 쪽으 신문 보도 역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뒤샹이 기본
로 한층 더 옮겨가기도 했다. 또한, 작품의 미니어처 복제판을 담은 이동식 미 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
술관을 선보여 예술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만든 이동 실, 이런 유명한 예술가로서 공인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동안 뒤샹은 20년
식 미술관은 <여행가방 속상자>라는 제목으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2차세 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최후의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1968년 그가 사망
계대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을 때 뒤샹의 망명자 처지를 상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방 만한 크기의 디오라마 작품 <에탕 도네>가
징하게 되었다. 공개되자, 그가 말년에 남긴 작업의 통일성이 확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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