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전시가이드 2020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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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전시
기억을 건너는 시간-블루 78x78cm Mixed media 2020 기억을 건너는 시간-블루 70.5x70.5cm Mixed media 2020
자서 킥보드나 전동자전거 혹은 배나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이다. 에 알리는 한편 주의를 요구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머리에 얹
목적지는 배경으로 깔린, 먼 곳에 자리한 저 도시로 설정되어있어서 그곳까지 은 커다란 동백꽃은 곰 인형과 동일한 맥락에서 아직은 어린 아이인 소녀의
의 아득하고 고독한 여정을 되짚도록 한다. 어두움 속에 높이 솟은 도시의 빌 꿈과 천진함 및 꽃으로 대변되는 여러 상징성을 거느린 일종의 오브제다. 속
딩들과 고가도로, 이국의 도시 풍경 등은 홀로 감행해야 하는 인생이라는 행 악한 세상에서 우리들 각자는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낭만과 청순함을 그
로를, 스스로 찾아 나서며 기술하여야 하는 삶의 지도를 다소 우울하게 떠올 러한 오브제에 기대어 표상하려 한다. 동물인형이나 장식물, 앙증맞고 팬시 한
려준다. 우수와 낭만, 희망과 불안이 상충하고 길항하는 심리적 드라마를 연 소도구들은 심리적 위장물인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매개 없이 있는 그
출하는 이 화면 구성은 익숙한 읽힘과 보편적인 주제의 투사지만 한편으로는 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여전히 이미지에 불과하고 실
가시화할 수 없는 정서의 짙고 습한 농도로 적셔져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제를 은폐하는 것일지언정 우리가 그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살아내기
란, 환영 없이 실제를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것 또한
이미지와 배경의 이러한 분리는 마치 스크린처럼 도시풍경을 펼쳐 보이면서 그러한 맥락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공간과 배리된 인물을 단독으로 안긴다. 여기서 어둡고 흐리며 아득한 거 윤형호의 그림이 이러한 도상을 통해 모종의 희망과 긍정을 담으려는 시도 역
리 속에 자리한 도시 풍경은 곧 부딪쳐야 하는 어린소녀의 삶의 공간이자 고 시 동일한 차원이라는 생각이다. 소녀를 포위하고 있는 거대한 도시 이미지
단한 생의 현장에 대한 심리적 불안의 측량할 수 없는 거리와 무게를 거느린 는 삶의 은유이자 미래를 암시한다. 그곳에 대한, 앞날의 삶에 대한 불안과 기
다. 그 무게감을 회청색 톤과 오일파스텔로 만든 스크래치가 지그시 누르고 대가 공존하는, 이 양가적 감정이 우리가 맞붙은 삶에 대한 기본적인 정서일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만큼 착잡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의 교차를 같이 지도 모른다. 아마도 작가는 그러한 인물의 내면을 표현 하려는 것 같다. 따라
포개고 있다. 분명 도시임을 알려주는 이미지들이 깔려있지만 그 원경의 장소 서 이 그림은 소녀 얼굴과 표정을 빌어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
들은 소녀의 얼굴과 몸에 비해 너무 멀리 밀려나있거나 가늠하기 어려운 상 하려는 그림에 가깝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에 대한 희망과 삶에
태로 지워진다. 막막한 앞날, 미래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성애처 대한 긍정의 메시지다.
럼 밀착되어 시야를 가리고 있는,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그 사이로 불빛은 반
짝이고 아이는 걷는다. 우리는 이 그림을 마치 영상 이미지나 이야기그림책의 한 장면으로 접한다.
특정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단순화시킨 도상의 성격이 강하다. 그것은 보는
커다란 머리와 큰 눈, 표정을 알기 어려운 얼굴을 지닌 소녀는 앞으로 펼쳐질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화면 연출이다. 서사적 상황이 전개되는 하나의 씬
자신의 생을 근심하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어 보인다. Scene으로서 다가온다. 그림은 모종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의 공통
소녀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경계 지점에서 요동치면서, 미성숙과 성숙의 교차 성이 그의 그림의 주제를 일정하게 받쳐주고 있다. 작가는 일정한 거리를 유
점 안에서 흔들린다. 청소년기는 일종의 통과의례와 비교적 고통스러운 일탈 지하면서 특정 장면을 잡아내고 있는데 따라서 그만큼의 심적 거리가 유지되
을 통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한다. 아직 도래하진 않았지만 그만큼 미지의 공 는 편이고 여기서 우리가 그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상념이나 상상을 떠올릴
포와 함께 경험되어야 할 것에 대한 은밀한 욕망이 교차한다. 그림 속 소녀는 수 있는 거리 또한 확보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화면에 안개처
온갖 역경을 홀로 감내하고자 자신의 몸과 연동된 몇 가지 도구를 챙겨 나섰 럼 깔린 일련의 색조들의 뉘앙스도 정서적 울림을 자아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다. 작은 배낭을 메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온전히 저장해둔, 그리고 인간의 아 그의 그림은 모두가 다소간 황량하고 어두운 편이다. 작가는 특유의 색조와 질
닌 의사동물의 형태로 위안과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하는 곰 인형, 그리고 타 감을 통해, 그리고 정겨운 아이들의 형상을 통해 삶에 관한 은유적인 이미지를
자들과 앞으로 펼쳐질 생을 공유할 장소를 찾아나서는 운송 수단이 그것이다.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깊이와 무게 속
날씨와 상관없이 착용한 노란색 우비는 선명한 색상과 함께 앞으로 들이닥칠 에서 따스하고 정겨운 희망과 메시지를 밝게 방사하고 있다.
여러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장비이자 자기 존재를 또렷하게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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