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전시가이드 2020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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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전시
























                                 꿈을 꾸듯  86x65cm  Acrylic on canvas  2019




            실을 연장시켜 주는 공간이고 현실계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가상으
            로 실현되는 곳이다. 현실을 환상과 가상으로 이겨나가는 역할이 배게다. 배
            게를 통해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조상들은 온갖 장식과 부적과도 같은 문
            자를 이용해 배겟모를 아름답게 치장했다. 굴레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을 장
            식한 이미지, 문자,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가 지시하는 것이 현실에서 반드시
            구현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 꿈, 잠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얽혀서
            삶의 한 중요한 영역이 된다. 또한 배게는 수직의 인간이 수평의 자세로 돌아
            가 휴식을 취하고 깊은 잠에 들어가는 통로이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을 옛                              바람이분다  65x85cm  Mixed media  2018
            사람들은 죽음의 상태(尸)로도 보았다. 현실을 조이는 완강한 고리가 순간 느
            슨해지거나 헐거워지는 순간이다. 현실에서 억압된 것들이 꿈에서 가능해지
            는 것이다. 이처럼 꿈은 현실과 가상, 이승과 저승의 간극을 부단히 지워나가
            는 동시에 가능해보이지 않던, 이루어질 수 없는 모든 욕망과 희구, 소망이 자     을 대신해 소녀의 얼굴, 두 눈을 감거나 살짝 뜨고 있는 상황, 그로 인한 표정이
            유롭게 허용되는 편이다.                                   보다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다. 2019년 작품에서는 나비가 주로 화면에 출현했
                                                            다면 근작은 꽃과 새가 중심을 이루고 더러 물고기나 꽃이 여자아이의 얼굴을
            단색으로 단호하게 마감된 배경을 등지고 있는 이 소녀는 성인이 되기 전의 여      흡사 가면처럼 덮는 경우도 있다. 소녀는 배게와 함께 꽃 위에 서있기도 하고
            자아이다. 아직 성인들의 세계, 사회의 규범에 편입되기 직전의 인간이다. 아      나비와 새들이 그 꽃, 어린여자아이를 향해 날아들거나 아이의 몸에 접속되어
            무것도 규정되지 못했기에 그만큼 모든 것이 상상될 수 있는 시간을 사는 소       있다. 공중 부양하는 듯한 소녀의 자세와 새, 나비는 비상(자유)에 대한 욕망,
            녀는 꽃과 새, 배게, 천(옷), 가구 등과 함께 다양하게 접속되어 연출된다. 허공  현실에서 부단히 탈주하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배겟모에 수놓아진 문양들
            을 비상하는 것들이 소녀의 얼굴과 신체에 접속되고 맞물린다. 사람이자 동시       역시 간절한, 모든 소망들 일 것이다.
            에 나비와 새, 꽃이 되기도 하고 그것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            어른이 되고 난 후 겪게 되는 각박한 현실적 삶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 유년의
            그림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것을 시각화하는 일이기도 하        기억, 성인이 되기 전에 꿈꾸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산다. 너무
            다. 따라서 작가들은 자신의 여러 단상들을, 그 생각과 감정 등을 물질화하고      나 현실적인 삶과 이제는 희미해진 꿈의 궤적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작가들
            가시적인 존재로 만든다. 파편화되어 흩어지며 비물질적인 것들이자 명료하         은 그러한 갈등을 좀더 개인화해서 발언하는 이들이다. 개인화는 사전적이거
            거나 정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시각적 상태로 고정시키려는 것,        나 개념적인, 상식적인 발언과는 달리 오로지, 전적으로 자신이 필터링한 갈등
            그림이 그럴 것이다. 김경자는 현실계에서 충족되지 못하고 억압된 것들, 실       이나 좌절에 대해, 꿈의 상실에 대한 절박한 음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익
            현되지 못하거나 미끄러져버린 어린 시절의 꿈과 동경들을 그림 안에서 구         숙한 도상의 차용이나 화면연출의 유혹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말하기, 다
            현하려는 듯하다.                                       르게 그리기를 요구한다. 개인화는 그만큼의 개별적인 방법론으로 구현된다.
                                                            회화는 형상의 독자한 도상화와 개성적인 붓질의 운용, 흥미로운 물감의 상태
            작가는 사실적인 묘사에 기반하는 그림을 통해 환상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사       를 통해 드러난다. 결국 회화성 내지 조형적인 깊이가 그림을 그림이게 한다.
            실과 환상이 얽힌 이 그림은 몇 가지 도상들과 단순한 배경으로 인해 메시지       특정 주제를 표현해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결국 그러한 그림의 방법론에
            가 간결하게 추려졌다. 인물과 꽃, 나비와 새, 그리고 옷의 주름 등의 묘사도     힘입어 더 밀고 나간다. 주제에 따른 그리기의 또 다른 시도, 방법론에 대한 고
            안정적이다. 반면 소재와 화면연출 그리고 회화적 기법은 익숙하고 소박한 편       민이 그림의 깊이를 만든다는 생각이다. 김경자의 그림은 삶에서의 비상을 도
            이다. 반복해서 그림에 등장하는 특정 소재들은 작가의 의도를 기술하는 문장       모하고 어린 시절의 꿈을 부단히 상기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른바 ‘환상적 리
            의 단어들과 같다. 근작에 등장하는 꽃, 새, 모자, 옷, 콘솔과 의자 등이 그렇다.   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그림을 통해 가시화하고자 한다. 자신의 정신적 자
            2019년도 그림에는 굴레를 쓰고 금속단추가 눈을 대신해 박혀 있으며 위, 아     유를 그림 그리기로, 미술의 힘으로 실현하려 한다. 그림 안에서 그 애틋한 희
            래에 그려진 선들이 흡사 눈물이나 눈빛 들을 연상시켜주는 인상적인 표면, 마      구가 적막하게 응고되어 출현하고 있다. 현실계에 안주할 수 없는 모든 인간
            치 인형이나 마네킹과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근작에서는 그 가면      의 보편적인 욕망이 스크린처럼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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