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5 - 샘가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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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기 이름 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우던 사람입니다. '바'라는 말이 '누구의 아
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더 좋은 미
래'를 지향하는데, 불리한 여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47, 52). 그는 시각장애인이
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취업할 수도 없었습니다. 구걸하는 것이 직업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아 연명해야 하는 인생입니다. 과연 이 사람에
게 ‘더 좋은 미래’가 주어질 것인가? '더 좋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본문에 나오는 바디매오와 같은 입장이 되면 일반적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람들을 기피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미래
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산다고 해도 바디매오처럼 걸인이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도와야할 가족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일 것입니다. 이 편견
은 아주 뿌리 깊게 내려온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장애인들을 공동체의 유지, 발
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추방하거나 유기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특히 스파르타
사람들의 '리쿠르구스 법전'(Lycurgus, 주전 800년경)을 보면 장애인과 노약자를 산중
에 유기할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장애인을 강물에 던져 익사시키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또한 뚜렷한 장애를 보인 아동들은 광장에 목매달아 죽였고, 후천적
으로 장애를 입게 된 아동들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신으로부터 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나버릴 인생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더 좋은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단초는 예수에 대한 ‘들음’
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
씀을 들을 지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롬
10:17). 여리고 성읍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
하였습니다. 그들을 통해 바디매오는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곧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들
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가 들은 예수의 대한 소문은 귀가 번쩍 뜨이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소경
이 보며" 그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간절한 기대를 갖게 된 것
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있는 앞으로 그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유월절이
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자신 곁
에 지나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그의 장애 때문에 더 간절히 예수께 부르짖었습니다. 만
약 그가 장애가 없었다면 예수께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
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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