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전시가이드 2020년 05월호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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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흥국사 대웅전 천장의 모란 벽화
리는 방식에서 따로 천이나 종이에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벽에 거는 방 또한, 여수 흥국사 대웅전의 천장에 그려진 모란 벽화는 민화의 모란 병풍도
식으로 변하게 되면서 탱(幀)이라 불리게 되었고, 탱화라는 용어가 만들어지 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흡사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면서 나눠지게 된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국가에서 지정하는 무형문화 불화에서도 여러 종류의 민화 소재를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시왕도(十王圖)에
재만 봐도 단청장을 1972년 8월에 지정하며 단청과 불화를 구분하지 않았으 서는 시왕 앞에 놓인 탁자 위에 민화의 책거리 그림 등에서 많이 그려지는 문
나,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6년 1월에 불화장을 별도로 지정하면서 둘로 방사우를 찾아 볼 수 있었으며, 쌍계사 국사암 독성탱(獨聖幀)에서는 모란과
나뉘게 되었다. 파랑새, 괴석, 그리고 씨 많은 과일인 수박, 오이, 참외가 담긴 백자접시를 보
면 민화의 한 폭이나 다름없다. 감로도(甘露圖)에서도 제단 위에 놓인 꽃과 화
민화를 살펴보면 일본 잡지 '민예(民藝)'의 1959년 8월호에 실린 야나기 무네 병등 많은 부분이 민화에 차용되었음을 보여주는데 구도, 색채, 표현기법 모
요시(柳宗悅)의 '불사의(不思議)한 조선 민화'라는 글에서 '민화'라는 명칭이 두가 단청의 벽화나 불화에서 민화로 그대로 옮겨진 것 같다. 이는 아마도 단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게 되 청이나 불화를 그리던 화공들이 민화를 그렸거나, 아니면 민화를 그리던 사람
면서 1960년대부터 민화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도 관심 들이 단청이나 불화에서 모방하였을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이 없어 부르는 명칭조차 변변히 없었던 것 같았고 민화라는 이름을 갖게 되
면서부터 서서히 주목받게 되었던 것 같다. 민화는 18세기 조선 후기에 시장 경제가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한 평민들도 그
림을 갖고자 하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단청 화공들이 단청 공사가 없거나 추운
단청은 일찍이 우리 겨레의 미의식과 정서가 담긴 예술로서 해학적이며 익살 겨울 같이 계절적으로 단청 작업을 할 수 없을 때 민화를 그려 주었던 것이 이
스러움을 다양하게 표현하였는데 그 중에서 귀면 그림을 보면 벽사(辟邪)의 후 많은 일반 평민들까지 그림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민화가 큰 인기를 끌
의미를 지니고 있어 주로 법당의 출입문 하단의 궁창이나 보머리, 화반에 그 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수요가 커지게 되었다. 이후 대량의 민화 제작이 필요
려 넣기도 하고, 수미단에 새겨 넣기도 한다. 서양의 교회나 성당 건물의 배수 하게 되면서 단청 화공은 물론 민화를 배워서 그리는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양
구로 쓰이는 가고일(Gargoyle)은 괴기스러운 형태나 악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성되었을 것이다. 이들이 서서히 민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작가군으로 성장하
귀면과 비교되지만 우리 단청의 귀면은 괴기스럽다거나 무섭다기 보다는 익 여 전업작가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고, 그림을 매매하는 전문 상인과 시장이 형
살스럽고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그 모습은 둥굴넓적한 들창코를 하고서, 두터 성되면서 대량으로 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운 눈썹에, 눈은 부리부리하여 오히려 놀란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작가의 창작이나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난 뭉뚝한 뿔은 크리스마스 루돌프 사슴의 뿔 같이 귀여워 보이고, 입에는 연 때였고, 이들 사이에는 경쟁보다는 공생적 측면이 강하고 모방이라는 게 크
꽃을 물고서 하얀 이빨에 잇몸까지 환하게 내보이며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가 묵인하였을 것이다. 단청이나 불화에
가 하면 혀를 빼물고 있기도 하여 그 익살스러움은 웃음까지 자아내게 한다. 서 사자상승이라는 계승 개념인 스승의 초를 그대로 제자들이 전수 받으며 화
또 다른 예로 부산 범어사의 독성전 문칸의 반원 모양을 한 아취형 상인방의 맥(畵脈)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던 경향이 민화에까지 퍼졌던 것은 아닐까?
양옆 가장자리의 귀퉁이에 두손을 쳐들고서 모란 꽃을 떠받치고 있는 주먹만
한 동자와 동녀의 모습도 앙증맞고 익살스러움이 넘친다. 강화 전등사의 대웅 우리 겨레의 미의식과 정서가 담긴 기복과 벽사, 길상을 추구하는 그림을 이
보전 수미단에 그려진 귀면과 부산 범어사의 독성전 문칸에 있는 동자와 동녀 름없는 사람들이 그렸다는 공통점과 그 발전 과정을 추정해 보면 단청의 뿌리
를 보면서 단청의 이런 파격적이고 해학적인 표현 수법이 민화에까지 영향을 에서 줄기가 크고 가지가 무성하게 퍼져 나가며 서로 갈라지게 되었기에 단청
주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과 민화는 다정한 이웃 사촌과 같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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