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전시가이드 2023년 08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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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전경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                                 칸에서는 운공형을 하고 있어 다채롭다. 내부는 화문(花紋), 비천문(飛天紋)을
                                                        조각하여 단청을 하였고, 천장은 화려하게 채색된 우물천장으로 꾸며져 있다.
                                                        지금은 단청의 채색이 많이 퇴색되고 박락되어 섬세하고 화려했던 아름다움
        상과 인도 카주라호의 나부상                                 은 짐작만 할 뿐이다. 대웅보전에서 독특한 점은 공포 위에 용의 모습인 듯한
                                                        동물의 형상, 귀면, 연꽃 봉오리 등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네 귀퉁이 기둥 위
                                                        에 벌거벗은 여인인 나부상(裸婦像)이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처마를 떠받치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사) 한국시각문화예술협회 부회장)
                                                        고 있는 모습이 매우 해학적이다.
        강화도(江華島)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으로 강화라는 지명은 강과 관       이 나부상에 관해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1614년(광해군 6) 12월 전
        련이 깊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은 강화도를 거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등사에 큰 불이 나 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새로 짓게 되었는데 이때 대웅
        이런 연유로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 고을이란 뜻의 강하(江下)로 부르다가      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아랫마을 주모에게 홀려서 알뜰히 번 돈을 철석
        940년(고려 태조 23)에 이르러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의 강화(江    같이 믿고 모두 맡겼지만,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가 돈을 몽땅 챙겨 들고 몰
        華)로 지명이 바뀌게 된 것 같다. 원래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서해 바다와 하     래 도망을 갔다고 한다. 도편수는 분한 마음을 앙갚음하는 방법을 궁리한 끝
        천의 오랜 침식작용으로 떨어져 나가 섬이 되었다. 섬 남쪽에는 민족의 영산       에 그 주모를 닮은 네 개의 벌거벗은 형태의 목조각을 만들어 법당의 네 귀퉁
        인 마니산(469m)이 있으며 그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참     이 기둥 위에 세워 둠으로써 지금까지도 옷도 걸치지 못한 채 창피를 당하고
        성단(塹星壇)이 있다.                                    있으며, 무거운 처마를 떠받치는 힘든 고통의 벌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여자에
        예부터 강화도는 서해에서 중부지방의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우리나          게 배신당한 남자의 한이 자비가 넘치는 부처의 도량(道場)에서 예술로 승화
        라의 중심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한 국방의 거점이었다. 고려 시대인 1232     되면서 전등사만의 독특한 양식이 된 것이라 하지만 다소 애처롭다는 생각
        년(고종 19) 몽골이 침입하였을 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 도읍으     이 들기도 하다.
        로 삼기도 했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5진, 7보,
        54돈대를 설치하고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 돈대 같은 군사 시설을 정비    이 목조각에 대해서는 옷을 벗긴 채 무거운 지붕을 받치는 벌을 받고 있는 모
        하여 요새화하였으며 19세기 말 이곳에서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   습이라고도 하고, 원숭이가 귀를 막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도 하는
        년) 등 서양의 함대와 많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등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목조각상은 네 귀퉁이에 4개가 있는데 이들은 비슷
                                                        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 손을 모두 올린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강화도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그중에        모습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왼손, 어떤 것은 오른손만 올리고 있으며 표정
        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전등사(傳燈寺)이다. 전등사는 381년(소수림왕      도 다르다. 불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원숭이가 귀를 막고 있
        1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지만, 고려 충렬왕(忠烈     다고 하는 견해에서 보자면 두 귀를 모두 막고 있는 것은 2개이고, 나머지 2개
        王, 재위 1274년~1308년)의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玉燈)을 시주  는 한쪽 귀만 막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목조각의 상태만을 보고 여자인지, 남
        하면서 전등사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자인지도 사실 판명하기 어려우며, 게다가 나부상인지, 원숭이상인지 결론을
                                                        내리기는 애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부상으로 보고 있고 나 또한 그렇게 생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은 1621년(광해군 13)에 중건된 정면 3칸, 측면 3칸  각한다. 이 나부상은 현대 조각으로 봐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조형적으
        인 다포계의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공포는 내4출목, 외2출목으       로도 아름답고 해학적인 표현도 뛰어나지만 단청의 채색이 퇴색되고 박락되
        로 살미첨차는 제1, 2 살미가 길게 휘어 올라간 앙서형이고, 제3살미는 아래로    어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휘어진 수서형, 그 위의 외목도리 받침재를 보면 주심에서는 동물 머리형,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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