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전시가이드 2021년 12월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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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보도자료는  crart1004@hanmail.net  문의 010-6313-2747 (이문자 편집장)



















                        Ewige Wiederkunft, 162.2x97cm, Mixed media on canvas, 2021










                                                                      Traffic Safety Mark, 130.3x130.3cm, Mixed media on canvas, 2020



                                                            화와 음악적 리듬을 보여주며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설사 화면이 원색
                       Ewige Wiederkunft, 162.2×97cm, Mixed media on canvas, 2021  조의 색면과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손 치더라도 이러한 카논은 다른 무채
                                                            색조의 작업과 동일하게 유지된다. 이는 아마도 작가가 젊은 시절 한국의
                                                            대표적 물감회사에서 몸담아 있으면서 안료의 화학적·물리적 특성에 대하
                                                            여 인지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색채감각이 화면의 격을 보전하고 있기
            곡식을 심는 것과 같은 표상활동으로 읽혀진다. 음계와 음표라는 재현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는 이미 재현의 가치를 초월한 기호로써 존재하나, 그의 화면에서는 이 기호
            조차도 인식부호라기보다는 표상 자체로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다면적          영겁회귀
            소통의 통로가 된다. 마치 현실의 끊임없는 복제가 원본 없는 복제로, 시뮬라      반복적인 노동에의 자기헌신은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 못지않게 자기와의
            크르가 재현불가능성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화해를 통한 내면과의 소통을 지향한다. 반복되는 정교한 수작업은 삶에 대
                                                            한 은유, 즉 인생이란 경우에 따라 따분할 수 있으나 한순간 순간이 나름대
            노동-창조성의 원천                                      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며, 그 순간들이 교접하여 역사의 수레바퀴가 된다
            한편 화면 중앙의 영겁(永劫/∞)의 형상은 원의 형상이 양파껍질처럼 축적된       는 사실을 자각케 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니체(F. Nietzsche)의‘영겁회
            것으로 제작과정은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스스로 제작한 컴퍼스를 사용하여        귀’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영겁회귀는 '차이와 반복'에 다름이 아니다. 세상
            겹겹이 원을 그리고 정교하게 색을 입혀 두 부분을 하나의 형상으로 연결시        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이 원환운동(圓環運動)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
            킴으로써 뫼비우스의 띠처럼 완전체로 존재하게 되는 이 형상은 미묘한 동심        고 있다는 이론이다.
            원을 이루며 조화와 균형, 이동과 멈춤, 이합과 집산, 형상과 비형상의 리드미
            컬한 형태미를 보인다. 여기에서 창조성의 원천은 노동이다. 페넬로페가 실로       결국 영겁회귀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한 개념과 이미지들의 순환운동
            옷감을 짜고 풀기를 반복했듯이 작가는 자연을 다채로운 무한대의 동심원으         이자 생성논리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뫼비우스 띠는 패러디이자 근거 짓
            로 변용하면서도 우주의 본질적 형태와 그 가치를 탐색하면서 대상을 축적해        기를 허용하지 않는 의미의 증식이다. 그것은 원본과 파생물, 사물과 허상
            간다. 형태와 공간은 대등하게 존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형태는 여       들 사이의 차이를 정하는 모든 근거를 해체한다. 그리고 박동찬의 그림에
            전히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론적 타당성을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서 보이듯이 무한히 새로운 생성동력을 잉태시킨다. 영겁회귀란 무한한 모
            즉 박동찬은 한편으로는 자연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응축하는 모더니즘의 방         사들의 모사다. 박동찬이 “좋은 음악은 영원하다”고 일갈하며 영겁의 표시
            법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앵포르멜적인 태도 즉, 감성적 반응이나        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음악부호들을 차용했듯이 그의 그림에서 영겁회귀
            기억, 심리적 인상 등을 통해 사물을 해석하고 있다. 앵포르멜적 요소와 기하      는 패러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겁회귀로 인해 근거는 완전히 와해되고
            학적 요소를 서로 충돌 없이 한 화면에 조우시킴으로써 부각되는 형태론적 완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예술은 더 이상 모방하지 않는다.
            성도는 숙명적으로 조형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화가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        박동찬의 그림에서 영겁의 형상은 생성의 존재이다. 부정의 회귀는 존재
            겠지만, 이러한 노동의 반복은 일상의 온갖 시름으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한다.       하지 않는다. 영겁회귀는 생성에의 의지 적극적 의지로 회귀한다. 이 끊임
                                                            없는 과정은 시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반응적이고 적극적인 미적 욕망들
            한편 여기에서 나타난 박동찬의 색채는 찬연하지만 속되지 않고 부드러우면         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과 죽음, 찰나와 영겁, 표현과 비표현,
            서도 생동적이다. 수많은 내러티브가 은연중에 드러나는 단색조의 매력적인         서사와 시뮬라크르적 표현을 통해 예술의 영원성과 윤회와 환생의 우주관
            화면에 뚜렷이 부각시킨 영겁(永劫)의 이미지에서도 그의 색채는 미묘한 변        을 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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