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쌍교동 우아한 작당전21. 11. 11 - 11. 19 갤러리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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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이 1970년대 와서야 극예술가로서 재평가되어 세상에                    현립 농업학교 유학길에 오른다.
            알려지기 시작했기에 그 시기에는 극작가로서 일반 대중에게
            회자된 인물은 아니였던 것 같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필요했던 소년 김우진은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이 거리에서 보냈다.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에 익
            화신 약국에서 성당길로 올라가면서 벽화 그림으로 도열돼                      숙했던 그 시절 유난히 감수성이 발달한 소년 김우진이 쌍샘
            있은 김우진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작은 도서관을 지나 성                     거리에서 서성이며 얼마나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취원에 도착했다. 손님의 어릴 때 가물한 기억으로는 크나큰
            대궐 같은 곳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내부가 무척 궁금했                   김우진 어린 시절부터 주위에는 많은 여성들과의 인연이 깊
            다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성당이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북                   다. 생모가 없는 우진에게는 유모와 여러 계모들과의 동거,
            교동 성당은 1958년 목포에서 3번째로 세워짐)                         등하굣길에서 마주치는 쌍샘거리에는 양동이를 들고 줄을 서
                                                                서 기다리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쌍샘거리는 성취원에서 북교초등학교로 가는 길목 70m 정
            도 떨어진 사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길은 달성동 벽화마을,                   김우진의 작품 전반에는 여성문제와 관련 여성의 존재가 중
            북교동 성당, 북교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옥단이 길과 접목돼                     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두더기 시인의 환멸”에서 활발한 신
            있고 소년 김우진의 등하교의 놀이터 길이였다. 이 사거리 중                   여성과 전근대적 순종적 여성상의 대비, “이영녀” 가정에 얽
            심에 현재의 아름세 게스트 하우스가 위치해 있다.                         매인 영녀, 김우진은 서구 근대극의 핵심을 여성문제로 파악
                                                                했다. 이 위대한 극작가의 여성 인식에 대한 근간의 태동은
            손님은 이 쌍샘거리 인근 주택 골목에서 태어났다고 했는데                     어린 학창 시절 성취원과 이 쌍샘거리에서 수많은 여성을 보
            안타깝게도 쌍샘거리 위쪽 아래 여러 갈래를 탐방하였으나                      면서 정립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생가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어 찾지는 못했다.
                                                                어머니 손님이 지형지물의 변화로 생가는 찾지 못할 때는 눈
            일제 강점기 유달산 인근 북교동에는 2개의 샘터가 있었는데                    물까지 보였으나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딸과 함께 고향
            그중 하나가 현재 아름세 한옥의 사거리에 있었던 큰샘이었                     투어를 했다는 자체만으로 감격하고 쌍샘거리를 다시 걸을
            다.                                                  수 있는 자체가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이곳을 “쌍샘거리”라고 했으며 공동 식수터인 큰샘은 인근 주                   이 쌍샘거리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자나 가난
            민의 상수도의 젖줄로 물지게나 양동이를 들고 길게 줄을 서                    한 자 어느 누구도 꼭 필요했던 생명수 거리로 사방으로 뻗어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일상 풍경이었다. 만성적인 물 부족                    가는 교통로의 요충지로서 중심로 였으며 목포의 대문호인
            에 시달렸던 당시에는 이샘은 우리 동네의 큰 보고이자 생명                    소년 김우진의 통학로이자 친구집이 있었던 거리로서 쌍샘거
            의 원천이었다.                                            리를 통했던 길에 그의 작품세계에 미치는 개혁적인 가치관
                                                                도 함께 정립되고 있었던 길이였을 것이다.
            쌍샘거리 주변은 구한말 개항 전부터 민가가 자연스럽게 군
            집돼 있었고 유달산과 남교동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                     우리 아름세 한옥은 위대한 대문호의 어린 시절의 향기가 묻
            다.                                                  어 나는 역사성이 있으며 쌍샘거리는 목포의 또 다른 심장으
             이 쌍샘길은 목포항 인근 상권이 형성된 중요 통행길과 성격                   로 통하는 길로 원도심의 자랑스러운 상징이다.
            이 다른 것으로 사람의 이동이 많은 또 다른 중심거리였다.                    나는 쌍샘거리 중심에 살고 있다.


            아름세 한옥은 그 당시 김우진의 동네 친구 집으로 알려져 있
            으며 하굣길 친구와 어울렸을 때는 소년 우진이 어머니에 대
            한 그리음을 자주 토로했다고 한다.


            김우진이 4세 때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계모속에서
            자랐다고 알려져 있다. 13세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4
            년 목포심상고등소학교 학업을 마치고 17세 일본 쿠마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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