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2019년09월전시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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然-107, 700×200cm, 한지, 먹,백토, 2015

















            작가 구모경의 작업은 수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양한 개성이 무제한적으       의 부담감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로 발산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질적인 재료의 사용은 이미 보편화 되었
            을 뿐 아니라 수묵과 채색의 병용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세태에서      재료와 표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한지를 이용한 독특한 구조로 이어지고 있
            오로지 수묵만을 지지체로 삼아 본격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는 오히려 희귀하        다. 스미고 번지는 수묵 특유의 물성을 십분 발휘한 한지 작업은 화면의 바탕
            고 신선하게까지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이미 화업의 시작 단계부터       을 견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수묵 특유의 그윽하고 은근하며 함축적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수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지향을 전통       표현을 더욱 심화시켜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재료실험이라는 제한적 의미
            에서 비롯된 관성의 일단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조형      를 넘어 자신이 지향하는 수묵 고유의 독특한 심미를 강조하기 위한 필연적
            의 내용과 요소, 그리고 그 변화과정 등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의지와 태생      선택이라 여겨진다. 더불어 이는 전통과 현대라는 상충되는 가치의 민감한 접
            적 감성이 수묵과 일정 부분 잘 부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점에서 작가가 취한 절충적 선택이자 수묵에 대한 주관적 해석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실경을 변용한 수묵 작업이었다. 그것은 자연, 혹은 자신
            이 속한 공간에 대한 관심을 수묵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전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수묵은 동양회화 전통의 실체이자 본령을 이루고 있다.
            통과 현대의 일정한 연계를 도모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발상과 표        그러나 오늘날 수묵의 위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것이다. 디지
            현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그의 학습기이자 수묵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        털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의 상황은 독점적이고 수직적인 보편성의 구조에서
            의 준비기라 할 것이다. 이후 그의 작업은 일변하여 보다 정제된 수묵 표현으      탈피하여 지역적 특수성과 차별성을 중시하는 다양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
            로 표출되었다. 특히 자작나무라는 특정한 소재에 천착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음을 상기한다면, 오늘날 수묵이 처한 현실은 안타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작업을 개별화함과 동시에 수묵이 지니고 있는 조형적 특성을 극대화 시켰다.       러한 상황에서 수묵으로 일관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작가의 존재는 반가운 것
            흑과 백의 단순한 얼개로 이루어진 그의 화면은 자작나무라는 특정한 소재를        이다. 더불어 그가 추구하는 수묵 작업이 형식재현의 생명력 없는 고답주위가
            수용하지만 이미 수묵 특유의 심미적 조건, 즉 정신적인 경계에 육박하고자 하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통한 수묵 정신에 접근하고자 함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
            는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다. 주지하듯이 수묵은 완결이나 완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자
                                                            연, 혹은 우주에 대한 부단한 사색의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언제나 변화
            수묵은 현상 너머에 자리하는 본질을 관조하는 관념의 세계이다. 그것은 형        하며 새로운 양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처음 선택한 수묵은 이미 타
            상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사변의 세계이다. 작가의 작업은 자작나무에서 비        인에 의해 이루어진 기성의 수묵이었다. 이를 자신의 사유를 전제로 한 주관
            롯하여 점차 순수한 수묵의 심미로 변화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마       적 해석을 통해 개별화하여 조형적으로 표출해 낼 것인가 하는 점이 바로 그
            치 득의망전(得意亡筌)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제 작가에게 자작나무는 그       가 천착하고 있는 작업의 요체일 것이다. 수묵이 혁명적 변혁을 통해 그 유장
            를 수묵의 유현한 세계로 인도하는 도구이자 수단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       한 생명력을 이어가며 동양회화 전통의 근간을 이룬 것이라면, 작가 역시 자
            닌 것이 되었다. 형상은 해체되어 공간을 부유하고, 수묵은 더욱 자유로워져       신의 작업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확보해야 할 것
            거침이 없다. 작가의 손길과 호흡을 반영하는 수묵의 조합은 이미 일정한 추       이다. 이는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 상황에서 전통과 현대라는 상
            상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전통적인 수묵의 표현 요소 중 필의 요소는 제거      충된 가치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될 것이다.
            되고 묵을 기반으로 한 면의 표현이 강조되고 있는 작가의 화면은 이미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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