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전시가이드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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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에서 카오스로 , 130.3x162.2cm, Oil on canvas, 130.3×162.2cm

            행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상하면서도 은밀한 정취가 느껴지는 것은 그가         틈이다. 산(山)과 산 사이에, 산과 물(水) 사이에,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이렇게 우리의 정신을 자신만의 어법으로 담아내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단       여백(餘白)이다. 기(氣)가 흐르는 통로다. 그곳에 나와 당신의 숨결이 흐른다.
            색화이면서도 단색화가 아닌, 단색화 이후의 새로운 비전을 담고 있는 그런 자      그곳에서 노닐며 어느새 저 깊은 잠재의식의 혼돈 상태를 체험한다. 하지만 고
            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는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요하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어디에 있는지는 고사하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틈 사이로 흐르는 숨결을 통
            글 : 이도규 작가노트 중에서~~                              해 색과 형상의 흔적들이 지닌 우연성과 가변성은 극대화된다. 그 극대화 과
                                                            정에서 기(氣)가 생성된다. 운(韻)으로 기를 느낄 수 있다. 그 숨결이 비어 있는
            황금빛 오후의 여정(旅程)                                  공간을 통해 퍼져 나가며 ‘생동(生動)’한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며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모호하다. 무엇을 기다리       그러므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는지는 고사하고 이젠 기다렸다는 사실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하나       물음에서 출발한 나의 작업은 모든 것을 수렴하고 있는 카오스chaos로 돌아
            도 분명한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조차 믿을 수 없다. 그나마 필연과 우연이    가고자 하는 열망, 바로 그것이다. 또한, 시간적 밀도의 프로세스는 내면을 화
            어우러지는 세상, 인간이 지니는 인식의 한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면에 내재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
            존재하는 세상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 본다.                       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간혹, 그 체험은 나
            이러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   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모두가 하나로 통합되는 더 높은 그 곳을 향한 것이
            심을 가지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서로 뒤엉킨 채 욕망을 감추고 있는 색(    기에 유쾌하다.
            金色, 銀色)과 형상의 그림자가 내게로 왔다. 켜켜이 쌓아 올린 물감 층 사이     예술은 실패와 결핍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그렇다. 나에게 있어 실패와 결핍
            에 존재하는 형상의 흔적들은 수없이 반복하는 행위를 통해 생성되고 소멸하        을 통해 무언가 이루려는 욕망은 필요충분조건이다. 또한 그 욕망으로부터 비
            기를 거듭한다. 그런 가운데 선(線)처럼 보이는 것들이 화면에 나타난다. 그러     롯되는 갈등은 언제나 나를 전율케 한다. 욕망 사이의 갈등이 모든 것을, 때로
            나 그것은 선이 아니다. 흔적이다. 반복적인 생성과 소멸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는 나의 존재마저 모호하게 하지만, 어느새 나를 숨 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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