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오산문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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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조상의 묘를 항상 잘 살피고 제사를 모실 때는 분에 넘치게 허례허식하지 말고 근검절약
하여 송편 한 그릇으로 모시더라도 공손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모시도록 교육을 시켰
다. 자손들 몸에 해롭다고 색소가 들어있는 사탕은 차례를 지낼 때 쓰지 못하게 하셨던 일
화가 있다. 제사를 모실 때 부녀자도 참석케 하셨고 네 번 절하는 것도 남자와 똑같이 두
번 절하게 하는 등 남녀평등의 현실적 감각을 지니고 계셨다. 1966년 한 해의 농사를 마무
리하고 추수를 마친 늦가을 그 해 시제를 잘 모시고 10월15일 하늘의 부르심에 의하여 선
생께서는 영면(永眠)하게 된다.
선생께서 살아생전 좋은 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신 수많은 일들을 오산지역 분들이 세워
주신 추모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추모비문
선생은 1898년 음 1월 12일 외삼미리 에서 태어나시어
1966년 11월27일 가시던 날까지 평생 이 고장에 사셨다
남을 위해 생각하고 고장을 위해 일하신 분
사셨던 세상에 끼침이 크셨고 가셔선 후세에 남김이 많으신 분
일제시 젊으신 날에 세우신 삼미의숙 백년의 대계이라
길이길이 빛나고 살 길이 여기 있다
선생이 닦으신 길 흥농계며 자작농계 저수사업 조림사업
내 고장의 농민들이 힘입어 살던 길 부민과 흥국의 터전 밝히시고 가신 분
해방 후 나라 서선 면장 소임 다하시고
황폐된 오산 설계 오늘날엔 자랑이고 심혈을 기울이셔서
터전 닦은 오산학원 예서 배워 이 땅의 기둥 되고
인후하신 천성으로 모성사업 펴셔서
궐리사 춘추 제향 만대에 이으신 분
이 고장이 낳은 교육자
이 땅의 농촌 사업가
식견이 탁월한 선견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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