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오산문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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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그리고 文盲을 退治코저 三美講習會를 설치하고 그 維持會를 33人으로 結成한後 白米 一
石六斗五升에 出資米를 爲始하야 追年增殖中 三分之二는 사업경비에 充用하고 三分之一
은 기본재산으로 적립한 현재고가 현금6천원과 백미34石이라한다.
그리고 무산아동교육공동경작조합을 조직하고 畓八反五畝와 田一反五畝를 貧困兒童12戶
에 斡旋한後 공동경작케하야 其收益으로 學資에 충당케한 결과 現今 56戶中 입학치 못한
아동은 全無하야 현재 재학아동이 140名에 達하며 2名의 교원이 敎鞭을 잡고 熱心指導하
고 있다.
그리고 또 內. 外三美里는 경작지가 전혀 天水沓 뿐이요 從來水利灌漑의 시설이 없어든 關
係上年年不作狀態에 빠져있었슴으로 부락민과 상의한 결과 몽리면적22町八反步의 저수
지를 설치하야 只今 와서는 年年旱魃의 憂慮를 一掃하였으며 또 內三美里,外三美里 합계
56戶의 貧困한 소작농가는 年年農糧費로 高利를 借入함으로 이를 痛歎한 尹學榮씨는 高
利借入防止와 迷信打破,農事改良,公課納期勵行,等 諸事業을 講究中이든바 189人이 일치단
결하야 柱式의 형식으로 華南興産組合을 창립하고 一口를 20원으로 定하고 1500口를 各
其分擔한後 十個年에 分配拂込키로 하야 자본금30,000圓을 적립케되었음으로 只今에 와
서는 農糧窮乏時期를 當하야 農
粮을 融通시키며 지방고리대차를
완전방지 하게 되여 공존공영의
갱생에 曙光은 날로 떠돌고 있다
한다.
선생께서는 화성궐리사(華城闕里
祠) 중건에도 참여하게 된다. 화
성궐리사는 노성궐리사(魯城闕里
祠)와 같이 공자(孔子)를 모신 사
당으로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하나인데 유일하게 정조대왕의
사액(賜額)이 내려진 곳이다. 이
곳은 원래 조선 중종 때 대사헌
오산중학교교사 상량식장-윤학영,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1952.5.25) 을 역임했던 공자의 64대 후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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