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오산문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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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이야기
는 오산에 있는 오산공립보통학교(烏山公立普通學校. 현 성호초등학교)까지 다닌다는 것
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구멍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주제에 무슨 학문이냐』 는 핀잔을 무릅쓰고 동분서주 유
지들을 설득하여 독지가 윤필선의 후의(厚意)로 무너져가는 초가집에 광목 커텐으로 벽을
삼아 삼미의숙(三美義塾)을 개교한 것이 1922년 겨울이었다.
그의 열성으로 마을엔 윤씨(尹氏) 종중학계(宗中學契)가 생겨 이를 후원(後援)했으며, 사재
(私財)를 털어 월사금을 받기는커녕 학용품까지 대주면서 학생들을 모집하였으나 입에 풀
칠하기 바쁜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후엔 제법 학
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3-4호정도의 자작농(自作
農)을 제외하고는 손바닥만 한 소
작으론 보리고개만 닥치면 학교는
텅텅 비어야만 했다.
자녀들의 학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술과 담배도 끊었다는 일화(逸話)
가 있다.
선생 댁에 일하러온 농민들에게 점
심을 줄때는 반드시 연필, 공책,
담배를 광주리에 담아놓고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 담배를
선택했으나 선생께서 자녀교육의
삼미공동경영조합제3주년기념-윤학영, 앞줄 왼쪽에서 4번째(1936.4.12) 중요성을 설득한 후에는 연필과 공
책을 선택하여 광주리에는 담배만
남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녀교육을 위한 생활터전이 급선 문제라고 생각한 선생께서는 1934년 약 60여 농가 가운
데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이 네 다섯 가구에 지나지 아니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의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소작농이었다.
선생께서는 자기 땅 만들기 운동인 삼미공동경영조합을 설립하여 자작농계(自作農契)를
조직 하게 된다. 이 운동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자작농(自作農)을 영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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