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1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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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남문의 이름은 ‘鎭南門’으로 문헌에 기록된 독산성 내 건물 중 유일하게 ‘鎭
                       南樓’와 동일한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건물 명칭의 동일성을 근거로 하여 진남루를 남

                       문의 문루로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水原郡邑誌』에서 진남루를 초루로 표현(『水原郡邑
                       誌』 ①)하고 있는데 위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초루를 성위에 누각이 아닌 문루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건물명에 사용된 한자의 동일성과 초루의 해석을 토대로 진남루와 남문의 문루

                       를 동일한 건물로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華城志』의 기록을 살펴보면 『水原郡邑誌』에 기록된 남문의 이름만으로 진남루를 문루
                       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22)
                         『華城志』山城
                         城堞
                         …(전략)…네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을 ㅁㅁㅁ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지금 임금께서 신묘
                       년(순조 31, 1831)에 비로소 편액 하였다.…(후략)…



                         이 기록을 보면 남문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지만 과거에 이름이 없던 것을 1831년(순조 31) 순

                       조에 의해서 이름을 갖게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華城志』가 1831년에 편찬되었고 『水原郡邑誌』
                       가 1899년에 편찬된 것으로 볼 때 『水原郡邑誌』에 기록된 남문의 이름은 순조가 지은 것으로 판
                       단된다. 즉, 남문은 1831년 이후에나 진남문으로 불리게 된 것이고 그 이전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진남루는 1599년에 변응성에 의해 건립되고 이 때부터 진남루라고 불리
                       고 있었는데, 이는 순조에 의해 1831년 진남문으로 이름 지어진 남문보다 200년이나 이른 것이
                       다. 따라서 후대에 지어진 남문의 이름을 근거로 하여 진남루를 남문의 문루로 보는 것은 무리

                       가 있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진남루가 남문의 문루가 아니라 순조가 남문의 이름을 정할 때 예
                       전부터 성의 남쪽에 있던 진남루의 ‘진남’을 따서 남문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존의 배경으로는 진남루를 남문의 문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한 독산성이 기록된 문헌뿐만 아니라 진남루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된 문헌들에서도 진남루

                       가 남문의 문루로 기록된 것은 단 한건도 없으며, 『華城志』와 『水原郡邑誌』에서는 남문의 기록은




                       22) 『華城志』 山城 城堞
                           …(전략)…有四門南曰 ㅁㅁㅁ 舊無名 當宁辛卯始 扁額…(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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