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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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정조가 세 번이나 성을 쌓은 까닭
1-1. 문무겸전의 실천
정조는 왜 성을 쌓았을까?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성곽을 보수하거나 신축하는 공사를 세 차
례나 벌였다. 1779년(재위 3)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1792년(재위 16)에 독산성을 보수했으며,
1794년(재위 18)부터 1796년까지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을 정
조가 건설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과
세마대가 있는 독산성도 정조가 새롭게 쌓았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정조가 재위했던 18세기 후반의 국내외 정세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동아시아는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였다. 전쟁의 위협이 없던 시기에 정조가 산성을 수리하
고 새롭게 성곽을 쌓았던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정
조가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했을 뿐 아니라 여러 권의 군사관련 서적을 편찬했다는 사
실이다. 조선 병법(兵法)의 완성이라고 평가받는 진법서 <병학통(兵學通)>(1785)과 무예훈련교
범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1790)는 정조의 국방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알려진 대로
정조는 대동(大同)과 인화(人和)를 강조하고 힘써 이를 실천한 군주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재위
하는 동안 “평화로운 시대에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여러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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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했다. 이러한 정조의 철학은 군제개혁이라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문(文)과 무(武)는 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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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날개와 같은 것”이라며 규장각과 장용영을 통해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정조는 뛰어
난 활쏘기 실력과 풍부한 군사지식으로 상무적 기풍을 확산시켰다. 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은 국
왕 정조의 상무철학과 장용영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무력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가 정조와 그 시대를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 정조는 경장대고에서 융정(戎政)을 풀이하면서 “군자는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움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君子有不戰 戰必勝]”
며 자신의 국방철학을 드러냈다. 정조는 매년 정기적으로 벌어진 능행 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석2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2) <무예도보통지> 권수 진설
독산성에 깃든 부국강병의 꿈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