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8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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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했을 무렵에는 성곽이 상당 부분 허물어진 실정이었다.
서명응은 허물어진 성벽과 타(垜, 살받이)를 수리하고 낡고 허물어진 성벽의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로 덮었다. 성벽에 벽돌을 사용하자는 것은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 실학자들의 공통된 주
10)
장이다. 돈대도 벽돌로 구축했다. 병자호란 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벌봉에 올라 홍이
포를 발사하여 행궁 기둥을 맞추어 인조를 비롯한 관료들이 충격에 빠진 일이 있다. 그래서 한
봉에 100명이 활동할 수 있는 돈대를 신축했던 것이다. 돈대를 근거로 굳게 지키면 산성과 기각
(犄角)의 형세를 이룰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남한산성의 사대문은 수어사 서명응이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사대문
을 수리하고 난 뒤에 서명응은 사대문의 이름을 새로 붙였다. 동문을 좌익문(左翼門), 서문을 우
익문(右翼門), 북문을 전승문(全勝門), 남문을 지화문(至和門)이라 이름 짓고 현판을 손수 써서
걸었다. 그러나 현재는 남문인 지화문 현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수어사 서명응의 안내를 받으
며 남한산성을 다 둘러본 정조는 신하들에게 다시 한 번 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옛사람이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하였다. 비록 이런 천연의 요새지[天塹]인 성
이 있더라도 인화가 없다면 어떻게 보존하여 지키겠는가?”
“<역경(易經)>에 ‘왕공(王公)은 험조(險阻)를 베풀어 나라를 지킨다.’ 하였거니와, 지리와 인화
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나라 군대를 걱정하였겠는가?”
정조는 말한다. “행행(行幸)이라는 것은 백성이 왕의 수레가 임하는 것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왕의 수레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
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제 내 수레가 이곳에 왔으니, 저 백성이 어찌 바라는 뜻이 없겠는
가? 옛사람이 이른바 행행의 의의를 실천한 뒤에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 경들
은 각각 백성을 편리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아뢰라.” 11)
남한산성 순시를 마친 정조는 승군들이 연출하는 진법을 살피고, 무과를 열어 군사를 격려했
으며, 성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어 행행(行幸)의 뜻을 나누었다.
10) 박제가, <북학의> 내편 성(城)을 참고할 것.
11)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3일 갑인 1779년
146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