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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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리한 ‘현륭원지’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효묘(孝廟:효종)께서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창덕궁 후원)에 납시
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는데, 그때에 쓰던 청룡도와 철봉이 아직까지 저승전(儲承
殿)에 있었다. 그것을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하였건만, 세자는 15, 16세부터 벌써 모
두 들어서 썼다. 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여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을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
확히 맞췄으며,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 그러
자 궁중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풍원군(豊原君:조현명)이 경연하는 자리에서 효묘를 빼닮았다고
한 말에는 과연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때 장신(將臣)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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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여, 책 하나를 엮어 이름을 <무기신식(武技新式)> 이라고 이름을 붙여 반포하였다. 이
14)
는 대체로 척계광(戚繼光)의 책 에 실려 전하는 무예가 단지 6기 뿐으로서 곤봉·등패·낭선·
장창·당파·쌍수도인데, 연습하는 규정에 그 방법이 대부분 잘못되었으므로, 옛책을 가지고
모조리 고증하여 바로잡았다. 또 죽장창·기창·예도·왜검·교전·월도·협도·쌍검·제독
검·본국검·권법·편곤 등 12기를 새로 만들어 도식을 그려가지고, 찌르고 치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 이 책을 전서(全書)로 편찬하여 훈련도감에 주어 연습하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倭)와 접하
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이니, 바로 옛날의 중원인 셈이
다. 지금은 비록 변경에 경보가 없지만, 마땅히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하여야 한다. 더구
나 효묘께서 뜻하신 일을 실현할 데가 없는데다가, 북쪽 동산의 한 자 되는 단(壇)은 나를 자다
가도 탄식하게 한다. 아, 병기(兵器)는 비록 아무 걱정거리가 없이 편안한 시기라고 하더라도,
성인들은 오히려 만들어 둠으로써 갑작스런 외적을 대처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에는 효묘께
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15)
정조는 1789년 가을에 아버지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성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
고, 이때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장용영 초관 백동수를 불러 <무예도보통지>
13) 사도세자가 임수웅에게 지시하여 1759년에 펴낸 책으로 <무예신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가 편집한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에 이 책의 서문이 전하고 있지만,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4) 왜구를 물리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는 임진왜란 때 전래되었는데 조선의 군사정책 전반에 커다
란 영향을 끼친 병서이다.
15)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0월 7일 기미 1789년 어제 장헌 대왕 지문
148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