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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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산으로 결정한 것은 1760년에 독산성을
                       방문했던 사도세자가 수원 화산을 찾았던 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3-2. 식목사업



                         1792년 4월 4일, 정조는 현륭원과 독산성에 나무를 심도록 지시했다. 독산성의 식목은 절충
                       장군 이정은을 비롯한 30명의 장교가 한 차례 나무 심는 것을 감독했는데 이들에게 각각 무명 1
                       필과 쌀 4말씩을 지급했다. 정조는 “현륭원에 나무를 심으면서 기유년(1789)부터 올해까지 8개

                       읍의 민력을 동원하여 다행히 완성하였으니,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도리로 볼 때 등급을 나누어
                       공로를 기억하는 일을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라며 식목사업에 참여한 관료와 일꾼들을 격려하

                       고 시상했다. 공로와 지위에 따라 승진을 시키거나 변장에 제수했으며, 품계를 더해주거나 마첩
                                                    16)
                       이나 표범 가죽을 내려주기도 했다.
                         용주사의 승려들도 식목에 참여했다. 총섭 철학(哲學)과 소임을 맡은 사일(獅馹)은 3차례나

                       감독하여 첩가를 주었고, 3차례 감독한 도잠(道潛)을 비롯한 승군 7명에게는 각각 무명 2필과
                       베 1필씩을 지급했다. 정조는 현륭원에 나무를 심을 때의 비용은 수원부의 재정으로 회계하고 8

                       개 읍의 부역을 치르러 나온 백성에게 지급한 양곡도 대동미로 회계하도록 경기 감사와 선혜청
                       에 분부했다. 이후 매년마다 현륭원 주변과 독성산성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사업이 이루어졌다.



                       3-3. 독산성의 보개축 공사


                         1792년에 독산성의 대규모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초가을에 내린 폭우로 성벽이 많이 허물

                       어졌던 것이다. 수원부사 이경무(李敬懋, 1728~1799)가 독산성에 올라 현장을 살펴보고 총융
                       사에게 “독성산성이 이번 장맛비에 성첩이 거의 절반은 무너졌고, 산기슭 또한 사태가 많이 났
                       다.”며 보수할 물자를 시급히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융사도 수하 장교를 독산성에 보내

                       현장을 살펴보게 했는데, 보고문에 따르면 무너져 내린 곳이 12곳이나 되었는데 그 길이가 101
                       보, 너비가 108보나 되었다. 장교는 사태가 난 여러 곳 중에 현륭원이 훤히 보이는 곳이 네 군데

                       나 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상황이 심각함을 파악한 총융사는 우선 사태가 난 곳에 빈 가마니로
                       덮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도록 조처하고, 보수하는데 드는 비용은 독산성에 있는 쌀 100석과




                       16) 일성록 1792년 4월 4일


                                                                             독산성에 깃든 부국강병의 꿈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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