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6 - 오산문화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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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바탕으로 정조가 저술한 것이 <성화주략(城華籌略)>이다.
                        수원읍성은 독산성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다. 기각지세란 달아나려는 사슴의 뿔

                      을 앞에서 잡고 뒤에서 다리를 잡는 것처럼 적의 앞뒤에서 적을 협공한다는 뜻이다. 화성이 건
                      설되면서 수원읍성 대신 화성이 독산성과 기각지세를 이루게 되었다. 화성을 완공한 후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 속에 정조의 여민사상이 압축되어 있다.



                        “성과 성가퀴가 이미 완성된 지금 제일 먼저 할 것은 곧 '집집마다 넉넉하게 차 있으며 백성과
                      백성이 서로 화락한다'는 여덟 글자이다[戶戶富實 人人和樂].”                 26)








                      Ⅳ. 독산성의 복원을 위한 제언





                        이렇듯 독산성은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지략으로 왜적

                      을 물리친 전설을 간직한 곳이며,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3대가 올랐던 특별한 유적이다. 정
                      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독산성에 오르고 수원 화산을 방문했던 사실을 기념하여 화산에 아버
                      지를 모시는 현륭원을 조성했다. 또한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을 모범으로 삼아 <무예신보>를 편

                      찬했던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독산성은 장용영 무사들이 무예
                      24기를 익혔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가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 외영의 5천 병력을 주둔
                      시켰던 것은 조선을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개혁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게 보면, 화성 건설은 독산성에서 시작된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
                      정할 수 없다.
                        독산성에 오르면 오산과 수원과 화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젊은이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기에

                      좋은 곳이다. 독산성은 지혜와 교훈을 주는 역사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효와 건강한
                      몸과 기상을 기르는 무예가 익혀졌던 현장이다. 그럼에도 오산을 벗어나면 독산성의 존재를 알

                      고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25) 홍재전서 제63권 잡저 10
                      26) 화성성역의궤 권1 전교 1797년 1월 29일



                      154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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